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31~34) - 이해인
31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32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33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34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