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26~30) - 이해인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28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29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30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