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정열 - 김수영
사면의 신문 위에 육호활자가 몇천개 박혀있는지 모르지만 너의 상상에서는 실제의 수십배는 담겨있으리라
이 무수한 활자 가운데에
신문기자인 너의 기사도
매일 조금씩은 끼이게 되는데
큰 아름드리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너는 네가 한 신문기사를 매일아침 게시판 위에서 찾아보는 버릇이 너도 모르게 어느덧 생기고 말았다
생각하면 그것은 둥근 옹이같이 어지러웁기만 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초점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이 초점을 바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낭만적 위대성을 잊어버린 지 오랜 네가 인류를 위하여 산다는 것도 거짓말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신문 한구석에 너의 피가 어리어있는 것이
반가워서 보고 있는 것인가
기사라 하지만 네가 썼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가히 무관한 것
그러기에 한결 가벼운 휴식의 마음으로 쓰고 있을 수 있었던 것
오랜 피곤도 고통도 인내도 잊어버리고
새사람 아닌 새사람이 되어
아무도 모르고 너 혼자만이 아는
네가 쓴 기사 위에
황홀히 너를 찾아오는 아침이여
번개같이 가슴을 울리고 가는 묵은 생명과 새 희망의 무수한 충돌 충돌......
누구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어오던
무색의 생활자가 네가 아니던가
자유여
아니 휴식이여
어려운 휴식이여
부르기 힘드는 사람의 이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너무나 무거운
너의 짐
그리고 안락, 안이, 허위......
모두다 잊어버리고 나와서
태양의 다음가는 자유
자유의 다음가는 게시판
너무나 어려운 휴식이여
눈물이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는
게시판과 너 사이에
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
달관한 신문기자여
생각하지 말아라
「결혼윤리의 좌절
-행복은 어디에 있나?-」
이것이 어제 오후에 써놓은 기사대목으로
내일 조간분 사회면의 표독한 타이틀이 될 것이라고 해서
네가 이 두 시간의 중간 위에 서있는 것이라고 해서
어려운 휴식
참으로 어려운
얻기 어려운 휴식
너의 긴 시간 속에 언제고 내포되어있는 휴식
그러한 휴식이 찬란한 아침햇빛 비치는 게시판 위에서 떠돌아다니면서
희한한 상상과 무수한 활자를
너에게 눌러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너는 아예 놀라지 말아라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