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2부 기묘한 천직 - 5
기차가 타인카슬 역에 도착한 것은 무더운 6월의 어느 날 오후 두 시였다. 프랜치스는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역을 빠져나왔으나 낯익은 거리 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점 앞에 이르러 보니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는 폴리 아주머니를 놀라게 해줄 양으로 살그머니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 여기도 조용하기만 하고 밖의 환한 곳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곳은 묘하게 어두컴컴했으며, 복도도 부엌도 텅 비어 있었고 다만 시계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네드가 식탁 앞에 앉아서 두 팔꿈치를 세우고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아저씨의 너무나 많이 달라진 모습에 프랜치스는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네드는 20킬로나 야위어 옷이 헐렁해 보였으며 둥글고 윤기 있는 얼굴도 비참하리만큼 초췌해져 버렸다. "아저씨!" 하고 부르며 프랜치스는 손을 내밀었다. 잠시 동안은 아무 대답도 없었으나 아저씨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불행에 찌든 것 같은 눈으로 겨우 상대를 알아본 것 같았다.
"너였구나, 프랜치스."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갑자기 와서 놀라셨죠?"
근심이 앞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방학이 되고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주머니는요?"
"출타했어......아아......아주머니는 이틀 전에 호이트리 만에 가셨다."
"언제 돌아오시죠?"
"글쎄, 아마 내일쯤 올 거야."
"노라도 같이 갔습니까?"
"응, 그래......" 네드의 대답이 이상하게 떨렸다.
"그래요?"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전보를 쳐도 회답이 없었군요. 그런데 아저씨......아저씨도 건강하신 거지요?"
"으음, 나는 건강해. 요즘 기후 탓인지 약간 이상은 하지만......뭐 대단치 않다. 나는 괜찮아."
아저씨의 가슴께가 갑자기 파도치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것 같더니 몹시 초췌해진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프랜치스는 뭔가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자아, 가서 뭘 좀 먹으려므나. 찬장에 먹을 게 많이 있으니까. 길포일에게 말하면 뭐든지 꺼내 줄 거야. 아래 주점에 있다 .그 사람에겐 많은 폐를 끼치고 있단다."
네드는 눈 둘 곳을 몰라 하며 다시 벽 쪽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프랜치스는 가방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갔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노라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깨끗하고 아담한 방을 얼핏 보고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고 황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점은 텅 비어 있었고 단골인 스캔티마저도 보이지 않았으며, 여느 때의 그 구석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단단한 벽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카운터 옆에서 길포일이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컵을 닦고 있었다. 프랜치스가 들어가자 그는 휘파람을 뚝 그쳤다. 약간 놀랐는지 일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에 젖은 손을 쑥 내밀었다. "여어, 여어." 그는 큰 소리를 쳤다. "야, 귀한 손님이 오셨군." 길포일의 주인 행세하는 태도가 약간 비위에 거슬렸지만 잠자코 받아 주고 나서도 프랜치스의 심장 고동 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농담처럼 말했다.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가스 회사는 어떻게 하고서......"
"회사는 이미 그만두었어" 하고 길포일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왜요?"
"여기서 아주 살게 됐거든......"
그는 모든 일에 익숙한 듯 컵을 하나 들어올려 햇볕에 비춰 보고는 입김을 후 불어 닦기 시작했다.
"와 달라고 부탁 받았기 때문이야......어쩔 도리가 없었지."
프랜치스는 신경이 이미 견딜 수 없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어찌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길포일?"
"길포일 씨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는데, 프랜치스." 길포일은 책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네드 씨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단 말이야. 옛날의 네드 씨가 아니야, 프랜치스. 옛날대로 좋아질는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다는 거요? 마치 아저씨가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래요, 프랜치스. 그 사람은......" 하고 길포일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제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말야."
듣고 있던 프랜치스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지자 그는 달래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주점에 오고 나서 열심히 일했단 말야. 거짓말 같으면 피츠 제랄드 신부님에게 여쭈어 보게. 전부터 다들 나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어. 자넨 커 가면서 휴가 때에 돌아오면 나를 놀림감으로 삼았었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너를 대단히 호의를 가지고 대해 왔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될 거야......특히 지금에 와선 말이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리고 지금에 와서라니?" 프랜치스는 이를 악 물었다.
"그래, 에, 에......자넨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그야 그럴 테지."
길포일은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었다.
"저번 일요일에 비로소 성당에서 공포되었다. 프랜치스, 나와 노라가 결혼하게 되었다고."
폴리 아주머니와 노라는 그 이튿날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포일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프랜치스는 불안하고 초조하여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렸었다. 그래서 프랜치스는 즉시 폴리 아주머니를 붙잡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폴리는 그를 보고 "프랜치스, 오지 말라고 일렀지 않았니?" 하고 울음 섞인 소리를 지르며 노라를 데리고 이층으로 뛰어올라 가 버렸다. 프랜치스가 아무리 물어봐도 아주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노라는 건강이 좋지 않아......병이라고 했잖니? 나가 있거라......간호를 해줘야 하니까 말이야."
핀잔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뾰로통하여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노라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폴리 아주머니가 노라의 방을 들락거리며 모든 시중을 들어주며 또 쉬지 않고 뭐라고 하는 소리와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주의를 주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버들가지처럼 여윈 노라의 창백한 얼굴은 그야말로 병자 같았다. 폴리 아주머니도 역시 초췌해져서 여느 때와는 달리 몸매무새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종 이마에 손을 대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밤늦게 노라의 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올 뿐 집안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무리 해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프랜치스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튿날은 무척 좋은 날씨였다. 그는 일어나자 습관적으로 새벽 미사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노라가 뒤뜰 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서 두세 마리의 병아리가 삐약거리면서 놀고 있었다. 그가 와도 그녀는 길을 터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멈춰서자 그제야 얼굴을 들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신부님 같군요.......일찍 다녀오시는군, 천당에 가시려고!"
그녀의 말투는 뜻밖에도 가시가 돋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황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사는 피츠 제랄드 신부님이 집전하셨나요?"
"아니야, 보좌 신부님이."
"그 무뚝뚝한 소 같은 양반이. 그래요, 하긴 그 사람 악의는 없어. 그렇지요?"
그녀는 여윈 턱을 더욱 여윈 손등에 괴고 병아리들을 복 있었다. 본래 허약한 체질이지만 이렇게 대쪽같이 마르다니......그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녀는 어른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치스럽도록 화려한 새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빛도 소녀 티가 가신 성숙한 여인의 눈 같았지만 가냘프기 짝이 없는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노라의 고통이 자신의 가슴을 찢어 헤치는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침 식사는 했니?" 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무리하게 먹게 하셨어. 정말로 내버려두었으면 좋으련만."
"오늘 어디 나갈 예정이라도 있니?"
"예정 같은 거 없어."
그는 다시 머뭇머뭇하고 있었으나 자기의 온 마음을 다 쏟아 빠르게 말했다.
"그럼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어? 노라, 전에 자주 갔었잖아. 오늘은 근사한 날씨니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말라빠져 홈이 패인 볼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야."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난 피곤해 죽겠단 말야."
"이봐, 노라. 가자.......부탁이야."
그녀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래, 좋아" 하며 일어섰다. 그 순간 프랜치스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막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잘라 서둘러 싸면서 마침 폴리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10분 후에 노라와 프랜치스는 빨간 전차를 타고 덜커덩덜커덩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스포스의 언덕길을 말없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왜 이 추억의 언덕길을 택했는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새싹이 돋아날 때여서 전원 경치가 참으로 좋았다.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것이었다. 사과의 꽃봉오리가 거품이라도 품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랭의 과수원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려고 입을 열었다.
"자아, 노라, 잠깐 들어가서 랭 아저씨께 인사나 하고 갈까?"
그녀는 사과 창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과나무로 흘끗 눈을 돌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토해 내듯이 말했다.
"싫어, 저런 곳에는 다시는 가기 싫단 말이야."
프랜치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신경질이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한 시경 두 사람은 고스포스 언덕 정상에 닿았다. 노라가 몹시 피로한 것 같아서 프랜치스는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서 도시락을 먹을 생각으로 멈추어 섰다. 보기 드물게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였다. 멀리 눈 아래의 평지에 둥근 지붕과 첨탑이 솟아 있는 시가가 금빛으로 반짝거리면서 펼쳐져 있고 전망이 무척 아름다웠다. 노라는 그가 펼쳐 놓은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프랜치스는 폴리의 강요하는 친절을 싫어하는 노라인 줄을 알기 때문에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 나무 그늘은 상쾌했다. 신록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두사람이 앉아 있는 나무뿌리 옆으로 융단과도 같은 푸른 이끼 위에 햇빛이 얼룩져 비치고 있었다. 향기로운 풀내음이 가득 대지 위에 넘치고 떡갈나무 가지에 콩새 한 마리가 날아와 외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노라는 나무 그루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돌려 눈을 감았다. 이러한 휴식만이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그러한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가냘프고 뼈가 드러난 목덜미가 말할 수 없이 가련하게 보였다. 복받쳐 오르는 슬픔이 노라를 어떻게는 지켜 주어야겠다는 감정을 몰고 왔다. 그때 노라의 머리가 나무 그루에서 미끄러질 것 같았으나, 그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노라가 잠깐 잠이 든 줄 알고 머리를 받쳐 주려고 팔을 뻗쳤다. 그때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과 가슴을 마구 때리며 소리쳤다.
"내버려둬요. 싫어! 이 짐승 같은......"
"노라, 노라! 왜 그러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프랜치스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속이지 말아요. 사내는 다 똑같아. 누구든지 다 그렇다니까."
"노라!" 그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부탁이야......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말해 줘!"
"똑바로 라고? 무엇을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줘......왜 네가 이러는지......왜 길포일과 결혼하는지......"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뭐가 나빠?"
그녀는 괴로운 변명을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입술이 말라 거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프랜치스는 간신히 대꾸했다.
"노라, 길포일은 쓸개빠진 아첨꾼이라는 건 잘 알지 않아......너완 질적으로 다르단 말이야."
"그 사람이건 누구건 다 마찬가지야. 모두 똑같다고 했잖아.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다운 일을 하게 할 테야."
그는 어안이벙벙하여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새파랗게 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망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더욱 혹독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하고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았었나.......영리한 눈을 가진 올챙이 사제님......설익은 성자님."
그녀의 입술은 통렬한 조소로 일그러졌다.
"하고 싶은 말 다 할 테야. 넌 우스꽝스러운 바보야......만화 같은 신부님. 꼴불견이야. 경건한 체 눈을 하늘로 향하고, 자기는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르는 모양이야......올챙이 승정님. 너 같은 사내들이 없었으면 참으로 좋겠어......난."
그녀는 숨이 차서 가슴을 거칠게 들먹이면서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했으나 드디어는 흐느껴 울며 그의 가슴에 허물어지듯이 안겼다.
"프랜치스, 프랜치스, 용서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해 왔는지 넌 알고 있잖아. 난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어. 차라리 네가 날 죽여 줘. 무섭지 않아. 모두가 귀찮단 말야."
프랜치스는 떨리는 손으로 노라의 이마를 쓸어 주면서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러한 그 자신도 역시 그녀에 못지 않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몸부림치며 흐느끼던 소리는 점점 낮아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그의 가슴에 안겨 얼굴을 파묻고 피로에 지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있던 노라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수건을 꺼내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를 봐, 노라."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말해."
"그럼 하겠어, 노라!" 젊은 피가 뜨겁게 그의 가슴을 불태웠다.
"이젠 나도잠자코만 있을 순 없어. 나도 뭔가가 이면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것을 기어코 캐내고 말 테니 두고 보라고. 넌 그 멍청이 길포일과 결혼해선 안 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노라. 너를 위해서 끝까지 싸울 테야."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잠자코 있었다.
"프랜치스, 내 말 좀 들어."
노라가 묘하게 몽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까 어쩐지 무척이나 오래 산 것 같은 기분이야."
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볼에다 살짝 키스를 했다. 그것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언덕길을 내려갈 무렵에는 높은 나무 위의 콩새도 울음을 그치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프랜치스는 결심한 바가 있어 파지장 근처의 마군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매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주점에서 추방된 스캔티만이 구석방 불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털 깔개를 만드는 북을 놀리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이 프랜치스인 것을 보고 멍한 눈이 반가운 빛으로 변했다. 그 빛은 프랜치스가 주점에서 슬쩍 가져온 위스키 병을 꺼냈을 때 한결 더 빛났다. 스캔티는 서둘러 컵을 꺼내 진지한 얼굴로 그의 건강을 빌면서 건배했다.
"야아, 이 맛, 이 맛!" 그는 너덜너덜한 소매깃으로 입을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인색한 길포일이라는 놈이 주점에 버티고 있은 후부터 난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어."
프랜치스는 등받이도 없는 나무 의자를 불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스캔티 씨, 유니온 주점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노라와 아주머니, 아저씨에게 말예요. 내가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요. 알고 있는 대로 말씀 좀 해주세요."
일순 스캔티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스쳐 갔다. 그는 프랜치스와 위스키 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그 집은 일을 어떻게 아는가?"
"아니, 알고 있어요.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는걸요."
"네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
"아저씨 가요? 아저씨는 마치 벙어리 같아요."
"안 됐어."
스캔티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리면서 십자 성호를 긋고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만한 사람에게 재난이 있으리라고는......"
그리고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나는 말할 수 없어, 프랜치스. 생각만 해도 부끄러울 뿐이야.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렇지 않아요, 스캔티 아저씨!" 하고 프랜치스는 재촉했다. "내용만 확실히 알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길포일의 일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스캔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키고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진지하게 긴장시키며 조용조용히 말했다.
"그럼,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이야기해 주겠네, 프랜치스. 실은 노라가 아기를 낳았어."
그 순간 프랜치스는 숨을 죽였다. 스캔티가 또 한 잔을 들이키고 있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죠?"
"벌써 6주일 지났네. 호이트리 만에 가서 낳은 모양이야. 애기는 여자아이였는데 그곳에서 어떤 여자가 맡아 기르고 있나 봐. 노라는 그 일로 인해 무척 괴로운 것 같아."
프랜치스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 가슴속의 격정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물었다.
"그럼, 길포일이 그 애 아버지인가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
스캔티는 제 정신을 잃은 듯이 증오에 불타는 눈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아니야, 천만에. 그 놈은 좋은 일 한답시고 아기에게 자기의 이름을 붙여 주고 한 술 더 떠서 유니온 주점에 들어앉은 거야. 악당놈! 그런 놈을 피츠 제랄드 신부가 두둔하고 있다네. 뻔한 일이야, 놈들이 하고 있는 것은. 결혼식을 올리고 그리고 신혼여행을 장기간 가 있다가 적당한 때에 그 아기를 데리고 돌아올 속셈이지. 정말 웃기는 짓이야. 그런다고 누가 모를 줄 알고......"
프랜치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억제하며 다시 물었다.
"노라에게 애인이 있었다니, 난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스캔티......누군지 당신도 알고 있나요......그 애의 아버지 말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스캔티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의 얼굴에 피가 왈칵 몰렸다.
"그런 것 난 몰라. 나 같은 가난뱅이는 알 도리가 없지. 네드 씨도 몰라. 정말이야. 네드 씨는 언제나 나한테 잘해 주었어.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야. 하긴 폴리 아주머니가 집을 비워 술에 취했을 때만 빼고 말이야. 이제 다 끝난 거야, 프랜치스. 아무리 찾아봐야 헛일이야. 그런 사나이는 알 필요도 없어."
다시 얼어붙은 것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프랜치스는 눈앞이 캄캄하여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그러나 간신히 일어났다.
"감사해요, 스캔티 씨. 여러 가지로 알려 주어서......"
그는 스캔티의 방을 나와 현기증을 느끼면서 아무것도 깔지 않은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갔다. 이마도 손바닥도 얼음 같은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어떤 환영이 머리에 달라붙어 그를 괴롭혔다. 아담하고 조용한 노라의 침실이었다. 그에게로 향한 증오는 아니다. 다만 연민의 정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지저분한 앞뜰을 지나자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전신주에 기댄 채 뱃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한이 났으나 정신은 아까보다 훨씬 맑아졌다. 그는 결심을 하고 성 도미니코 성당 쪽으로 걸어갔다. 성 도미니코 성당의 가정부는 조용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가정부는 잠시 안에 들어가 1분쯤 있다가 희미한 등불이 켜진 현관으로 다시 돌아와 비로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오세요, 프랜치스. 신부님께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프랜치스가 들어가자 제랄드 신부는 코담배 쌈지를 손에 든 채 일어섰다. 붙임성이 좋고 탐색적인 태도나 사내다운 풍채는 프랑스 풍의 가구에 고풍스런 기도대, 벽에 걸려 있는 이탈리아 문예부흥 전기의 훌륭한 복제화와 방안을 향기롭게 하는 테이블 위의 백합, 그리고 그 섬세한 화병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야아, 어서 오게, 프랜치스. 북쪽에 가 있는 줄만 알았지. 자, 앉으라고. 호리웰의 내 친구들은 모두 잘 있나?"
코담배를 집으려고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프랜치스가 입고 있는 교복과 넥타이를 보고선 옛날 생각이 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로마에 가기 전엔 거기에 있었지......근사하고 훌륭한 학교야. 마그냅과 타란트 신부는 로마 신학교 시절의 내 동창생들이지. 둘 다 장래가 유망한 친구들이었어. 그런데 프랜치스."
그는 잠깐 말을 끊고 기분이 좋은 부드러운 시선을 엄숙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뭐 내가 도움이라도 될 일이 있나?"
프랜치스는 괴로운 표정을 하고 숨을 헐떡이면서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라의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말이 떨려 지금껏 온화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했다.
"그래, 노라 양의 일이라면?"
"길포일과의 결혼 문제 말입니다. 노라는 그럴 의사를 갖고 있지않습니다......옆에서 보기가 딱합니다. 어쩐지 바보짓 같고 부정한 것 같고......헛되고 또 무서운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넨 그 무서운 사건이란 것을 알고 있는가?"
"네......다 알고 있습니다......노라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랄드 신부의 부드럽던 얼굴에 순간 당혹의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이성을 잃은 청년을 엄숙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랜치스 군, 자네도 언젠가는 성직에 봉사하리라고 생각하네. 그때 나의 경험을 반이라도 쌓았다고 하면......불행하게도 나는 너무 많은 경험을 했지만, 어떤 종류의 사회적 질환이든 같은 방법의 특수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걸세. 자네는 이번......" 하고 신부는 잠시 생각하더니 프랜치스가 산 말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무서운 사건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았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나는 사실 주점을 잘 알고 있지만 좋은 곳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것도 이 교구를 구성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열등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너나 나라면 침착하게 라크리마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눈물'이라고 하는 이름의 이탈리아 산 붉은 포도주)를 조용히 음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에드워드 바논 군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단 말이야. 그것도 좋다고 치자. 나는 누구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야.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거야. 우리처럼 몇 시간이고 단조로운 고해실에서 지내는 사람으로서는 불행하게도 드문 일이 아니지만."
제랄드 신부는 잠시 말을 끊고 점잖은 손놀림으로 코담배를 꺼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먼저 태어난 어린아이를 법률상으로 인정시키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노라에게 적당한 배우자를 물색해서 혼인 성사를 맺게 하는 일이지. 뭐든 확실한 질서를 밟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야. 한번 망쳐 버린 사람에게도 다시 훌륭한 카톨릭의 가정을 만들어 주는 일이야. 뒤얽힌 실이라도 사회라고 하는 건전한 직물로 짜 나간단 말이다, 알겠나. 노라가 길포일과 결혼을 한다는 건 잘못된 게 아니란 말일세. 머리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사람은 착실한 사내야. 두고 보라고. 2, 3년쯤 지나면 노라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에워싸여 미사에도 나오게 될 테니까......매우 행복하게 말이지."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프랜치스의 꼭 다문 입술에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노라는 결코 행복하게 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상처 입고 불행하게 될 뿐입니다."
제랄드 신부는 약간 놀란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자넨 행복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나?"
"그러는 동안에 노라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할 것입니다. 무리하게 노라에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신부님보다 제가 노라의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가까이 있어서 잘 안다는 얘기로군."
제랄드 신부는 약간 바보 취급을 하는 것처럼 미소지었다.
"너 자신이 그 여성에게 육체적인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핏기를 잃은 프랜치스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노라를 몹시 좋아합니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고해실을 더럽히는 사랑의 방법은 절대로 취하지 않습니다. 부탁입니다."
그의 말소리는 이상하게 낮았고 필사적인 어조를 띠고 있었다.
"이 결혼을 노라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총명하고 다감한 영혼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팔에 아기와 남편을 강제로 떠맡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진하고 죄 없는 노라를......"
제랄드 산부는 노기가 충천하여 담배 쌈지로 테이블을 탕탕 쳤다.
"나에게 설교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부님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릴 뿐입니다."
프랜치스는 누그러지는 마음에 채찍질을 하면서 최후의 힘을 짜냈다.
"하다못해 노라에게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이미 충분해요, 프랜치스 군."
아무리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고 얼굴색을 변하게 했을 때에도 곧바로 스스로를 누르고 또한 상대방까지도 제압하는 능력을 지닌 사제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납작한 금시계를 꺼내 보였다.
"여덟 시에 회합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사제는 따라 일어서는 프랜치스의 어깨를 안 됐다는 듯이 가볍게 두들겼다.
"자네는 아직 어려. 사물을 보는 눈이 어리다고나 할까. 그러나 다행히도 성당이란 것이 있단 말이야. 이것이 네 현명한 어머니시다. 그 성당이 원치 않는 일은 결코 하지 말라고, 프랜치스. 성당은 몇 세기를 거쳐왔고, 반항보다 더욱더 강한 저항에 견디어 왔으니까 말이다 .자, 똑똑한 프랜치스, 결혼식이 끝나면 다시 오라고. 그때 호리웰의 이야기나 좀더 하게 말일세. 그때까지 오늘의 너의 무례한 언동의 속죄로서 나를 위하여 성모송(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을 외워 주지 않겠나."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다.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 프랜치스......하느님의 축복을."
밖은 밤기운이 차가웠다. 프랜치스는 어린 자기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제관을 나왔다. 그 발자국소리가 침울하게 메아리쳤다. 성당의 돌계단까지 왔을 때 마침 성당 문을 닫고 있었다. 하나 남은 등불도 꺼져 버리고 어둠 속에 우뚝 선 성당의 높은 건물이 망령같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절망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것 같은 기도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지자 프랜치스는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한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집안의 분위기는 잔잔한 연못과도 같았다. 노라는 얌전해졌고 폴리도 어딘지 희망을 찾아낸 것 같았다. 더구나 네드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혼자서 고독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 멍청한 눈에 담겨 있던 공포의 빛은 엷어져 갔다. 결혼식은 은밀히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수와 지참금 등은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으며 신혼 여행도 당초 예정대로 하기로 했다. 집안에는 혼수감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폴리는 입에 핀을 물고 차례차례 완성되어 가는 옷들을 하나씩 입혀 보면서 가봉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포일은 점잖은 체하면서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구경을 했으며, 고급 담배를 피우면서 네드와 주점의 재정 문제 등을 상의했다. 공동 경영 계약서를 작성했고, 또 결혼 후 자기들이 살 집 무제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곤 했다. 길포일 쪽의 가난한 친척들이 떼를 지어 드나들었고 알랑거리며 제멋대로 굴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것은 시집간 길포일의 누님인 미세스 닐리와 그의 딸 샬로트였다. 노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프랜치스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재빠르게 한 마디 했다.
"알고 있죠......그렇죠?"
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그런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음, 알고 있어."
두 사람은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잠시 동안 서 있었다. 프랜치스는 더 이상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글썽이면서 밑도끝도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노라......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나는 네 일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몰라......나도 너 하나쯤은 돌봐 줄 수 있어. 일하겠어, 너를 위해서라면. 노라......우리 어디로든 가자!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말야."
그녀는 측은한 얼굴로 프랜치스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고, 어디로 가지?"
"어디든 상관없잖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으나 프랜치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새 옷의 가봉을 하러 황급히 가 버렸다. 결혼식 전날이 되자 그때까지만 해도 끌려 다니기만 하던 노라가 여느 때와는 달리 생기를 되찾아 조금 마음을 터놓게 되었다. 폴리가 홍차를 들고 왔을 때도 노라는 순순히 받아 마시며 말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호이트리 만에 다녀오고 싶어요, 오늘 당장."
폴리는 깜짝 놀라 그 말을 되물었다.
"호이트리 만에? 오늘 당장이라고?" 그리고 당황하여 덧붙였다.
"그럼나도 함께 갈까?"
"나 혼자 가고 싶어요" 하고 말을 끊었으나 조용히 홍차를 저으면서
"그렇지만 아주머니가 꼭 같이 가고 싶으시다면 좋아요."
"물론, 나도 가보고 싶었거든."
노라의 그 명랑한 모습에 폴리는 안심하고 호이트리 만에 가는 것을 승낙해 주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노라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노라는 어렸을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아름다운 길라니 호수 이야기며, 그곳의 유람선 선장이 대단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등을 명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점심때가 지나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길모퉁이에 서서 노라는 프랜치스가 서 있는 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에 약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가 버렸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것은 폴리 아주머니가 실신해 차로 실려 오기 직전이었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술렁거리고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젊은 여자가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이처럼 호기심과 동정을 모은 것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파지장 근처의 여자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어깨들을 맞댄 채 이 불행한 여자의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했다. 결국 그런 비극을 초래한 것은 신부가 새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세상의 동정은 길포일을 비롯하여 바논 일가에게로 집중되었으나 동시에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혼례 전에 기차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젊은 여성은 크게 경계를 해야 하는 것으로 되기도 했다. 결국 노라의 장례식은 성당의 악대를 동원하여 읍장으로 성대히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날 밤늦게 프랜치스는 자기도 모르게 성 도미니코 성당에 와 있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그는 감실 앞 빨간 성체불이 흔들리는 것을 의식할 뿐이었다. 굳어져 버린 것처럼 창백해져서 무릎을 꿇고 있으나 마치 운명이 무자비한 그물을 쳐 놓고 그 속에 자신이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이다지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울래야 울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차갑게 다문 입술로는 어떤 기도도 드릴래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괴로운 가운데에 문득 머리에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고뇌 그 자체인 이 몸과 마음을 희생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그의 곁을 떠났고,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던 노라가 다시 떠나 버렸다. 이것은 이미 그에게 주어진 천상의 성약인 것이다. 그렇다, 가자......가지 않으면 안 된다......마그냅 신부에게로......산 모랄레스로. 그리고 자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는 이때 비로소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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