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의 봄은 유난히 추웠다. 겨울의 추운 여정을 끝내고 새싹을 틔우기에 여념이 없던 나무들에 따스한 봄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1.8평 남짓한 서대문구치소의 독방은 매우 추웠다. 성경책 이외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스며 나오는 한기와 외로움이 나를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스산함을 중화시켜 줄 뿐이었다. 재판을 받으러 다니는 육군본부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유일한 낙인 시절이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일반 죄수들과 합방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중죄인임을 표시하는 노란 표찰을 가슴에 달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20여 명의 눈동자. 독재에 맞서 당당히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던 나도 잔뜩 얼어 방안을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야 저 친구는 그냥 놔 줘.” 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마음씨 좋게 생긴 남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이, 여기가 네 자리야.” 서열이 있다는 감방 안에서 좀 괜찮은 자리가 배정되었다. “다 좋은 사람들이야. 단지 사회에서 잘 대접을 못 받아서 그렇지. 네가 진정한 운동권이라면 이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야 해. 이 환경을 즐겨 봐. 그러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장물을 취급하다가 들어왔다는 ‘감방장’ 형님의 말은 사람들을 보는 나의 시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렵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나도 그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함께 생활하면서 가난은 정말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금방 방안 식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없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나보다 9살이 많은 그 형님은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주었다. 먼저 출소한 내가 가끔 면회를 갔는데, 어느 크리스마스에 형님이 나를 찾아 왔다. 성탄절 가석방으로 나온 형님은 그 후 5년을 넉넉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함께 살다가 결혼했다.
최근 삶을 힘겹게 개척하면서 용기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무지개 가게》를 준비하면서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주었던 그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분들이 여전히 내게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