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너르고 오래갈 수 있음은, 자기의 삶을 조작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무(無)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무의 상태란 아무 것도 없음이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엔 담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털어냄으로써 그 어떠한 것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능히 사사로운” 것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생의 사사로움 이란 무엇일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그 식단 안에 3대 영양소를 골고루 배합하는, 더 나아가 3대 영양소를 포함하면서도 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혀를 만족시켜 주는 것과 동시에 분위기 있는 장소에서 근사한 옷을 맘껏 뽐내며, 멋스러운 여유를 즐기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한이 없다. 근사한 치마를 사면 그에 따르는 근사한 구두를 신어야 하고 또 그에 걸 맞는 핸드백과 스카프라든지 어울리는 아이템을 걸쳐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있다. 한 끼 식사에는 분위기 있는 장소와 근사한 옷과 신발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것들은 분명 사사로운 것들이리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시기하며, 반대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 또한 ‘사사로움’ 혹은 ‘덧없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좋음’ 또는 ‘싫음’ 감정 자체는 사사로운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생기는 그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의 격변들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사소한 행동과 습관까지도 거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슬림’은 자신의 행동과 마음까지 바꿔놓게 된다. ‘있는 대로의 현상과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대로 주위의 환경과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짓는 데서 사사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자는 “몸을 내져짐으로 해서 몸이 존하고, 새로이 존한 몸으로 모든 사사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해탈’의 경지와 다름 아니다. 지고의 득도에 의한 어려운 해탈이 아니라, 나와 너를 이해하고 ‘너의 사사로움’을 인정할 때 생기는 작은 인정의 샘이 바로 무한의 그릇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만큼 어렵고도 쉬운 것은 없다. ‘될 대로 되라’의 자포자기적인 내던짐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삶의 작은 모든 것을 담을 소박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미 ‘무한그릇’의 초벌굽기는 마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