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겨우내 얼어붙은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의 계절이다. 그러나 T.S.엘리엇은 봄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했다. 그는 ‘황무지’에서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며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봄을 잔인한 계절로 묘사한 것이다. 김영랑 시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봄을 ‘찬란하지만 슬픈 계절’로 묘사했다. 그런데 ‘찬란’과 ‘슬픔’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찬란함’은 ‘아름다움’과 ‘빛남’을 표현하는 말이어서 ‘슬픔’과는 호응할 수 없는데도 김영랑 시인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했다. 김영랑은 슬프지만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슬픔이라는 의미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했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의미를 강조하는 역설법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사용된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 ‘승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상생활에서도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때 아닌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조직을 재편해야 한다’ 등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들이다. 올해 우리나라의 봄은 ‘잔인한 계절’이 되고 있다. 경기침체와 극단적인 남북 대치상황, 4ㆍ13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뒤숭숭한 분위기까지 겹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꽃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시인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