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법 중에 수식관(數息觀)이란 게 있다. 들숨과 날숨마다 하나 둘 숫자를 붙여 열까지 세는 것이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망상의 족쇄를 끊는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딴생각이 나고 숫자를 까먹는다. 마음에 오만 가지 생각이 동시에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나마 입이 하나인 게 다행. 동시에 두말을 하지 못하고, 한 순간엔 하나의 소리만 낼 수 있으니. 하지만 세상일 차근차근 순서대로 벌어지면 좋으련만 여러 일이 동시에 벌어지니 문제. 이렇게 동시에 벌어진 일을 한 문장에 담아내는 장치가 ‘~면서’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한다. 공 차면서 껌을 씹는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책을 읽는다. 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한다.’ 앞뒤를 바꾸어도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일하면서 음악 듣기. 껌 씹으면서 공 차기. 책 읽으면서 볼일 보기. 운전하면서 노래 부르기.’
가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때도 있다. 우스갯소리 하나. 중학생이 목사한테 당찬 질문 하나를 던졌다. “목사님, 기도하면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목사는 “어디서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냐?”며 화를 냈다. 풀 죽어 있는 학생에게 친구가 넌지시 한 수 가르쳐준다. “질문을 바꿔봐.” 학생은 며칠 뒤 다시 묻는다. “목사님, 담배 피우면서 기도해도 되나요?” 목사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물론이지.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잖아.”
한 문장 안에 두 개의 사건이 담기면 배치에 따라 선후 경중이 바뀌고 논리가 생긴다.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정치와 은유(1): 전쟁
정치에서 제일 많이 동원되는 것이 전쟁 은유이다. 정치는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전쟁터다. 우리는 선하지만, 상대방은 악하며 궤멸시켜야 할 대상이다. 선거는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 운동 경기이자 게임. 둥둥 떠다니는 유권자들을 공략하여 우리 쪽으로 끌고 와야 한다. 특정 후보의 열정적인 지지자라면, 승리에 대한 간절함과 함께 혹여나 무능하고 위선적인 상대방이 권력을 잡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전쟁 은유는 사회적 대립을 말로 더욱 과장한다.
분단 상황은 대선 토론 주제로 ‘진짜 전쟁’을 올려놓았다. 사드 추가 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 대치 상황을 ‘옆구리도 치고 다리도 치고 복부도 치고 머리도 공격하면 다 방어해야 하는’ 격투기에 비유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맞기 전에 ‘선빵’을 날려야 하는 거고.
문제는 같은 전쟁도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을 갖는다는 점이다. 경험의 차이는 상상의 차이를 낳는다. 은유는 중립적이지 않다. 총을 쏴본 사람에게 전쟁은 방아쇠를 당겨 총알이 날아가 상대방의 심장을 뚫고 나가는 장면이다. 총을 쏴보지 않은 사람은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여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 연상된다. 핵미사일에 대해서도 달라진다. 발사 버튼을 누르는 자와 폭격을 당하는 자. 그래 봤자 ‘전쟁에서 이긴다는 말은 지진과 싸워 이긴다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데도 말이다(지넷 랭킨, 미국 최초 여성 하원 의원).
정치를 전쟁으로 본다면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사라진다. 이 세계를 달리 해석하고 다른 처방을 내리는 대안적인 정치 은유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