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꼬맹이들이 초승달을 쳐다보며 왜 저렇게 생겼냐 묻는다. “하나님이 쓰는 물잔이라 목이 마르면 물을 부어 마신다”고 했다. “정말요?”(이게 끝이면 좋으련만, 엄마한테 달려가 ‘엄마! 하나님이 초승달로 물을 따라 마신대’라며 일러바친다. 헉, 잽싸게 피신.)
인간의 본성 중에서 좋은 게 하나 있다. 뭔가를 ‘잘 못하는 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잘 못하는 능력. 가장 빠른 길을 알면서도 골목길을 돌아 돌아 유유자적하는 능력. 방탄소년단 수준의 춤 실력이 있지만 흥을 돋우려고 막춤을 추고, 더 먹을 수 있지만 앞사람 먹으라고 젓가락질을 멈춘다. 당신도 목발 짚은 사람이 있으면 앞질러 가기가 미안해 걸음을 늦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덜 발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새들은 최선을 다해 울고, 고양이는 있는 힘껏 쥐를 잡는다. 너나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야수사회다.
가진 능력보다 잘 못하게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농담이다. 농담은 심각한 말의 자투리이거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간식이 아니다. 그 심각함과 진지함 자체가 ‘별것 아님(!)’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허세가 아니다. 외려 가난할수록, 나이 들수록, 난관에 처했을수록, 다른 꿈을 꿀수록 ‘실’없고 ‘속’없는 농담은 힘이 된다.
농담을 잘하려면 엉뚱하면 된다. 관행과 법칙과 질서에 비켜서면 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마음에 사이공간이 생긴다. 거기서 놀면 된다. 다른 세상은 농담으로 앞당겨진다. 우리의 목표는 능력이 아니라, 웃음이다. 즉, 모두의 행복.
말과 유학생
대학은 사시사철 말과 글이 피어나는 꽃시장이다. 그런데 피지 못한 꽃들이 있다. 외국인 유학생.
그들은 강의실의 섬이다. 그림자처럼 뒷자리에 웅크려 앉아 있다. 말을 건네면 웃고 만다. 뭔가를 참아내고 있는 듯하다. 숙제의 첫 문장은 존댓말인데 두 번째 문장부터는 반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전문가의 글솜씨로 탈바꿈. 자동번역기를 쓰거나 참고자료를 짜깁기한 것이다. 선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대학원생도 적지 않다. 한국 학생에게 유학생의 의견도 들으면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라고 권하지만, 실패한다. 기죽어 있는 학생에게 ‘괜찮다, 천천히 말하라. 한국어가 서툴 뿐 할 말이 없진 않다’는 격려는 무력하기만 하다.
귀찮거나 피하고 싶다가, 성적 처리 기간만 되면 고마운 존재로 바뀐다. 성적의 바닥을 깔아 준다. 대학교육을 망쳐온 상대평가제의 최대 희생양은 유학생들이다. 유학생에게 ‘B’는 꿈같은 학점이다. 한국 학생이라면 ‘성적산출근거’를 묻는 메일을 선생에게 보낼 텐데.
외국인 유학생은 수년에 걸친 등록금 동결로 쪼들린 대학의 가장 손쉬운 수입원이다. 유학생 유치 전쟁은 한국어 실력에 대한 기준을 더욱 낮추었다. 문턱을 낮춰 일단 가게 안으로 들인 다음, 말이 통하지 않는 ‘호갱’을 이리저리 뜯어내곤 나 몰라라!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차별과 무책임의 기원이 한낱 언어 문제라는 게 부끄럽고 한심하다. 자유이용권을 팔고서는 ‘키가 작으니 놀이기구는 못 탄다. 키 작은 건 너의 책임’이라니. 말 때문에 이등 학생을 만드는 건 염치없다. 뽑았으면 책임도 져라. 말을 가르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