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 전체를 본 적이 없다.(사회가 있기나 한가?) 그럼에도 사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에 따라 사회는 유기적인 생명체이기도, 적재적소에서 돌아가는 기계이기도, 계급투쟁의 전쟁터이기도, 말(담론)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어떤 이미지를 갖느냐에 따라 세상사에 대한 해석과 해법이 달라진다.
불교철학에서는 이 세계를 ‘불꽃’에 비유한다. 초를 켜면 몇 시간 동안 불꽃이 계속 타오른다. 한 시간 뒤의 불꽃은 처음 불꽃이 아니다. 두 시간 뒤의 불꽃은 처음 불꽃이 아니다. 불꽃은 순간마다 다 다르다. 하지만 앞의 불꽃이 없다면 뒤의 불꽃도 없었을 것이므로 아무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본래의 것도 없지만, 단절된 것도 아니다.
불교는 본성 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본성 없음’과 ‘연속성’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독립적이지도 본래적이지도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것은 변한다. 불변하는 본질이란 있을 수 없다.
말이야말로 한순간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어든 문장이든 글이든 변치 않는 의미를 갖는 말은 없다. 시공간과 사람 따위의 인과적 조건(맥락)이 다르므로, 어제 한 말과 지금 하는 말이 다르다. 당신의 말과 내 말은 다르다. 순간순간 타오르는 말의 불꽃이 있을 뿐이다. 허무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억압하고 후벼 파는 말이 아닌 자유롭고 해방적인 말이 되려면 말을 둘러싼 인과적인 연관을 포착하려는 실천의지가 필요하다. 말은 돌덩이가 아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다.
백신과 책읽기
나는 천성이 맑고 선하며 예의가 바르다(=맹탕이고 비겁하며 남들 눈치를 본다). 여간해서는 어른들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다. 맞는 말에도 허허, 틀린 말에도 예예.
마을 일로 마을회관에 갔더니 동네 원로 몇 분이 와 계셨다. 모임 시작 전에 한 분이 백신 얘기를 꺼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백신 중에서 제일 ‘싸구려’인데, 그걸 왜 우리보고 맞으라고 하냐는 것이다. 20만원짜리도 있는데 이건 꼴랑 4천원. 조용하던 마을회관이 노인 차별 규탄의 장으로 바뀌었다. ‘늙은이들은 싼 거나 맞으라는 거냐?’ 카톡에서 얻은 정보다. 백신 가격과 백신 효과는 관계가 없다거나 이윤을 남기지 않고 공급하려는 정책 때문이라거나 유럽 각국의 총리도 다 이 백신을 맞았다는 얘기는… 안 꺼냈다.
한국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바닥권이라는 피사(PISA)의 발표가 있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내용은 학생이 읽어야 하는 글의 길이였다. 핀란드, 덴마크, 캐나다 등 상위 국가는 100쪽이 넘는 글이 전체 글의 70~75%를 차지한다. 한국은 10%에도 못 미쳤다. 76개국 중 67위이다. 긴 글을 읽는 행위와 문해력은 상관관계가 높다. 또한 디지털보다 종이책으로 읽고, (시험이나 강제가 아닌) ‘즐거움’을 위해 읽어야 문해력이 길러진단다.
방법은 많지 않다. 문해력을 기르려는 공동 노력뿐이다. 나도 마을 어른들과 책읽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맹탕처럼 보이는 처방이지만, 가짜 정보와 사특한 논리를 가려내어 남녀노소, 빈자와 부자가 어울려 사는 마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