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문 규범은 근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말과 글에 일정한 질서와 공통성을 부여해주었다. 이제 그 역할을 다했으니 놓아주자. 근대의 성과를 디딤돌 삼아 한 단계 올라서려면, 성문화된 맞춤법, 표준어 규정을 없애야 한다.
어문 규범을 없앤다고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어문 규범은 이미 뿌리내렸다. 올바르게 철자를 쓰라는 요구는 이제 문명인의 ‘최소’ 기준이자 사회적 장치다. 학교 교육, 다양한 미디어 환경, 공공언어 영역은 언어의 공통성을 유지하는 버팀목이다.
좋은 점은 많다. 우리는 늘 판결을 기다린다. “‘어쭙잖다’는 맞고 ‘어줍잖다’는 틀린다”는 식. 반면, 영어에서 ‘요구르트’를 ‘yogurt’, ‘yoghurt’, ‘yoghourt’로 쓰지만 큰 문제가 안 된다. 어문 규범을 없애면 다양한 철자가 공존하게 된다. ‘마르크스’와 ‘맑스’, ‘도스토옙스키’와 ‘도스또예프스끼’를 보고 ‘이렇게도 쓰나 보군’ 하며 넘어갈 수 있다. 사회적 분노 지수를 낮추고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 생긴다.
불문율이 언어의 본질에 맞는다. 말에는 사회성과 함께 역사성이 뒤엉켜 있다. 그래서 늘 애매하다. 강조점에 따라, ‘닦달’을 쓸 수도, ‘닥달’을 쓸 수도 있다. 말에 대한 의견 불일치의 유지와 공존이야말로 말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야구에서 ‘9회에 10점 이상 이기고 있는 팀은 도루를 하지 않는다’고 법으로 정해놓았다면 얼마나 재미없나. 성문법을 없애야 지역, 사람, 시대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다. 말의 민주화와 사회적 역량 강화는 성문법의 폐지에서 시작된다. 꿈같은 얘기다.
맞춤법을 없애자 2
성문화된 맞춤법을 없애자고 했더니 말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구단을 다 외웠으면 벽에 붙여놓은 구구단표를 떼어내야 한다. 현대적 말글살이를 위해 한걸음만 내딛자.
성문화된 규범이 없어도 표기의 질서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성문법이 없는 절대다수 국가가 이를 보여준다. 한글 맞춤법은 공통어의 형성이라는 근대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와 일본 제국주의의 언어말살 정책에 맞서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겹친 시기에 제정되었다. 변변한 사전도 없고 합의된 표기 방법도 없던 상황에서 이룬 커다란 성취다.
현행 맞춤법의 대원칙은 ‘(1)표준어를 (2)소리대로 적되 (3)어법에 맞도록’ 쓴다는 것이다.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 우리를 괴롭히지만, 다른 표기 방안보다 여러모로 낫다. ‘갓흔’(같은), ‘바닷다’(받았다)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자던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1912)이나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방안’(1954)에 비하면 한국어의 특성을 합리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 결과 맞춤법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독보적 원리로 정착되었다. 문화적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공적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적 습관(아비투스)이 되었다.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될 것이다. 즉, 역사성과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니 겁내지 말자. ‘꼿밧에 안자 잇는 옵바’(꽃밭에 앉아 있는 오빠)라 쓴 책이 팔리겠는가.
문제는 ‘표준어’다. 맞춤법을 없애자는 주장은 결국 ‘표준어’를 없애자는 것이다.(다음 주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