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다. 하나밖에 없다. 무한한 우주를 뒤지고 억만 겁의 시간을 오르내려 보아도 언제나 하나밖에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하나밖에 없을 때 우리는 거기에 고유명사를 붙인다. 사람 이름을 비롯하여 산 이름, 강 이름, 별 이름, 동네 이름, 상호가 그렇다. 관심과 애정이 가는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 애정이 있어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은 더 깊은 애정을 다시 부른다(집착과 함께).
잘 알려진 고유명사는 다른 대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재활용되기도 한다. 이강인은 한국의 ‘메시’이고 독재자는 ‘히틀러’이며 과학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는 꼬마 ‘아인슈타인’이다. 예쁜 산을 두고 한국의 ‘알프스’라 소개하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유명사의 확장이다.
반대편에 일반명사가 있다. 여러 사물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다. 태백산이든 수유리 화단이든 앞집 계단이든 피어나면 모두 ‘꽃’이다. 절집이든 고물상 앞마당이든 산 너머든 멍멍 짖는 녀석은 ‘개’다. 낱낱이 가진 차이는 사라지고 그저 하나의 공통성으로 묶인다.
그런데 일반명사라 하더라도 각 사람에게 고유명사인 게 있다. 아무리 이 세상에 같은 이름의 대상이 널려 있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밖에 없다. ‘엄마’라는 말을 떠올려 보라. 세상 ‘모든 엄마들’이 아니라 ‘우리 엄마’만 떠오른다. 물건도 곁에 오래 두고 지내면 나에게 유일무이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관계의 그물로 맺어진 인연과 체험에 따라 일반명사가 점점 고유화되는 걸지도 모른다. ‘고유한 일반명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그 이름은 그리움으로 바뀐다.
국가 사전 폐기론
‘국가 사전’: 민간이 아닌 정부가 펴낸 사전.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말함(비슷한말: 관변 사전, 관제 사전).
사전 뒤에는 사전 만든 사람이 몰래 숨어 있다. 중립적 사전은 없다. 사전 편찬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배제할지, 그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결정한다. 그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
국가 사전을 없애자고 하면, 사전 출판 현실을 모른다고 타박하거나 말글살이에 대혼란이 올 거라고 겁을 낸다. 기왕 만들어 놓은 걸 왜 없애냐고 한다.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교체할 만큼 사회적 역량을 갖춘 한국 사회는 유독 사전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명령의 집합체이자 일방적 힘을 행사하는 장치이다. 국가 사전은 그 자체로 명령과 통제의 언어이다. ‘다른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이제 <표준사전>만 검색한다.
사전은 언어를 바라보는 다양한 철학과 기준들로 서로 경합해야 한다. ‘복수’의 사전이 계속 나와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 예술 정책의 기조는 사전 영역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 사전을 낼 만한 역량을 갖춘 출판사나 대학, 전문가 집단 몇 곳에 10년짜리 예산 지원을 해보라. 창고에 묵혀 두었던 사전 원고를 다시 꺼내고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들을 찾아나서 각자의 색깔과 향기에 맞는 사전을 만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엄청나게 다양한 일본어 사전 못지않은 사전들을 보게 될 것이다. 국가 사전을 폐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