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막말’이란 없다. 누가 나에게 쌍욕을 하더라도 그 말을 누가 하냐에 따라 막말이 되기도 하고 정겨운 말이 되기도 한다. 겉보기에 아무리 ‘점잖은 말’도 모욕감을 느끼거나 구역질 날 때가 있다. 말보다는 말의 주인이,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상황이 중요하다. 그 덕에 말은 끝없이 변화하고 원래의 의미에서 탈선한다.
어떤 말도 그 자체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어원이 속되고 차별적이더라도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를 미치지도 않는다. 권력이 개입될 때, 다시 말해 권력을 확인하거나 획득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이용될 때 말은 언어권력이자 경멸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때 말은 누군가를 대변하고 누군가를 동원한다. 그래서 막말은 (눌려 있던 무의식이 드러나는) 말실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력이 없다. 비슷한 크기의 상징자본도 없고 파급력 있는 미디어에 쉽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막말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않도록 권력을 회수하는 것,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회수하는 것, 말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막말 생산 집단에 그 말을 되돌려주어 자신들이 한 말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푸념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다시는 국가가 국민을 내팽개치지 않도록 ‘우리는’ 4·16 세월호 참사, 5·18 광주, 4·3 제주, 그리고 위험의 외주화와 비정규직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무수한 죽음의 비극과 부조리를 ‘징글징글하게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뼈까지 발라 먹을’ 것이다.
뉴 노멀
‘자본주의4.0’, ‘패러다임 전환’, ‘아침형 인간’이란 말의 위성정당 같은 단어. 세상이 뿌리부터 바뀌고 있으니 ‘새로운 표준’에 맞춰 살라는 시장의 명령. 소비자의 생활 방식과 구매 패턴이 바뀌자 새롭게 떠오른 마케팅 전략.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이후 지속가능성과 공생의 가치가 부각되고 개인도 현재의 삶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반영하면서 생긴 말. ‘새내기’란 말에 ‘헌내기’가 된 2학년처럼 어제의 습관은 냄새나는 ‘올드 노멀’이 된다. 어제와 결별함으로써 새 시대의 맨 앞줄에 선 듯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 같은 말.
새말이 유행을 타면 지하실에 곰팡이 피어나듯 널리 퍼진다.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이때구나 하고 이 말을 쓴다. 코로나로 야구장에서 침을 못 뱉는 것도 뉴 노멀이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도, 온라인 강의와 배달문화가 확대되어도 뉴 노멀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번 총선을 평하며 ‘민주당 주도의 1.5당 체제’로 굳어지는 상황을 ‘뉴 노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쓴다.
당최 시공간의 연속성을 찾기 힘든 한국에서는 오늘 당면한 문제를 당면하기 위해 매일 아침 어제와 결별해야 한다. 못나고 늦된 사람들이 고유한 습관 한두 개를 고안해낼 즈음, 그건 이미 ‘올드’하니 버리라 한다. 아뿔싸, 우리는 매일 새로 태어나야 하는 아기이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나그네 신세. 하지만 사람은 단골집이 사라졌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 앞을 서성거리듯 기억과 미련의 존재. 이 불온한 세계는 혁명적 단절보다는 누더기옷을 기워 입듯 과거를 수선하여 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