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세계를 이해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문장이 ‘주어’와 ‘서술어’로 짜여 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주체’(참여자)와 ‘작용’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건을 ‘주체’와 ‘작용’으로 나눈다고 해서 모든 언어가 같은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한국어는 ‘비가 온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피오베’(piove; rains)라는 동사 하나면 된다. 홍콩 부근의 광둥어에서는 ‘하늘이 물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틴록수이’(天落水)라고 표현한다.
사건을 주체와 작용으로 나누는 문법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대상이 외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다’가 자연스러워 보이겠지만, 이미 오고 있는 비가 다시 온다고 하니 이상하다. ‘얼음이 얼다’라는 말을 곱씹어보라. 이미 언 것(얼음)이 다시 얼어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다. ‘낙엽이 떨어지다’라는 말도 벌써 떨어진 것(낙엽)이 다시 떨어져야 한다. ‘천둥번개가 친다’라는 말은 더욱 이상한데, 마치 ‘천둥번개’란 놈(주체)이 구름 뒤에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번쩍 콰르릉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와 ‘작용’으로 나누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그 결과 자꾸만 ‘없는 주체’를 만들게 된다. 버려서 쓰레기인데 ‘쓰레기를 버리다’라고 하면 쓰레기가 될 본성을 타고난 놈이 따로 있는 것처럼 된다. 동시적이어서 조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시시때때로 주체는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주체는 허깨비 아니겠나. 비는 오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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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타
‘현실 자각 타임, 현자 타임’의 준말. 같은 듯 다른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후회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헛된 꿈이나 망상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현타’는 욕망을 채워도 밀려들고 채우지 못해도 밀려드는 마음이다. 침대 위든 명품점이든 골방 안이든 거리든 버스 안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욕망도 임시직이다. 하기야 고용도 임시적이니 소유나 사랑도 임시적일 수밖에. 시장의 모든 변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제는 개인을 언제든 손쉽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임시화하고 유연화시켰다. 모든 잉여들을 수시로 제거하고 불필요한 오물들은 갖다 버린다. 이 시대의 욕망도 투입 대비 성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모든 걸 거머쥘 기세로 솟구치다가도 손을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이내 사그라든다. 모으기보다 탕진하고 참기보다 발산한다. ‘자신을 재발명하라’는 시장의 명령은 스스로 좋은 사냥감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만들었고, 반대로 좋은 먹잇감이 나타나면 직선으로 달려들어 덮친다.
메뚜기처럼 분주히 ‘튀어’ 다니다가도 문득 ‘이게 사는 건가’, 물을 때면 이내 허탈감이 밀려든다.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자각, 내가 너무 멀리 와 있을지 모른다는 자각은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적 건강성 면에서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알아차린 현실이 허탈감, 상실감, 고립감, 무기력, 분노와 같은 병리적 감정 상태에 가깝다면, 그 현실은 자각되어야 할 게 아니라 극복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