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늘 변한다. 흥미롭게도 변화의 동력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 내용에 있지 않고 형식에 있다. 형식이 마련돼야 내용이 꿈틀거린다. 말도 그 자체로 변하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 변한다. 이 새로운 환경이 말의 의미를 바꾸는 동력이 된다.
동작이나 상태의 뜻이 있는 명사에 ‘하다’를 붙여 동사를 만든다. ‘공부하다’ ‘걱정하다’ ‘하품하다’에 붙은 ‘공부, 걱정, 하품’을 보면 말 속에 움직임이나 상태의 의미가 느껴진다. 이럴 경우 ‘하다’는 명사의 동작이나 상태를 곁에서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나무’라는 말에서 어떤 동작이나 상태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그저 사물을 뜻한다. 그런데 ‘하다’가 붙자마자 나무를 ‘베거나 주워 모으는 행동’의 뜻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명사’가 ‘하다’와 함께 쓰인다는 환경 자체가 원래 없던 동작과 상태의 뜻을 갖게 하는 조건이 된다.
‘애정하다’가 낯설다. 비슷한 뜻의 ‘사랑하다’ ‘좋아하다’가 있는데도 새로 자주 쓰인다. ‘애정’에는 동작의 뜻이 없었다. ‘하다’와 붙여 쓰다 보니 없던 동작성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몇 해 전에 공격한다는 뜻으로 유행했던 ‘방법하다’도 비슷하다. 반복적으로 많이 쓰이면 시민권을 얻는다. 어제는 틀린 말이 오늘은 맞는 말이 된다. ‘축구하다, 야구하다, 수영하다’는 자연스러운데 ‘탁구하다, 골프하다’는 살짝 어색하다.
어쩌면 낯익음과 낯섦의 간극은 어떤 인과의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얼마나 자주 만나고 보고 쓰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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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말은 없다
한심하게도 나는 아내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입을 꾹 다문다. 내 잘못이라 달리 변명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차별의식이 배어 있어 그렇다. 이런 사람들이 경기 내내 얼굴을 감싸고 웅크린 권투선수처럼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가 반격의 찍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열에 아홉 내용보다는 말투가 귀에 거슬릴 때다.
타인에게 ‘예쁘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도 평소에 우리는 말 자체에 ‘곱고 예쁜 말’이 있다고 착각한다. 예쁜 말은 ‘검기울다, 길섶, 싸라기눈, 애오라지, 잠포록하다, 푸서리, 해거름’처럼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순수한’ 고유어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쁜 말’이 무엇인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 고유어는 예쁜 말이고 한자어나 외래어는 예쁘지 않은가. 우리의 정서를 잘 담고 있어서? 어감이 좋아서? 그런 정서와 감각은 모두 같을까? 말뜻이 잘 통하고 더 많은 이를 포용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예쁜 말’ 아닐까? 예쁜 말은 따로 없다.
더구나 대화 장면에서 ‘예쁜 말 하기’는 예쁜 낱말을 골라 쓰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말 예쁘게 합시다’, ‘예쁘게 말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는 말은 대화 내용에 대해는 ‘할 말 없음!’이지만 대신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말고 고분고분 말하라는 이율배반의 뜻이다. 동등한 위치가 아님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신호이자 자신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적어도 섣달그믐까지는 예쁘게 말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