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연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주시경은 백운동 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후손으로 1876년 12월22일에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며칠 있으면 그의 생일이다. 그는 배재학당에 다니며 <독립신문>에서 교정을 맡아 일하면서 우리 국어의 현실을 마주하며 세상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남대문 근처에 있는 상동교회의 야학 교실을 비롯하여 중앙, 이화, 휘문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학회 활동을 하며 훗날 국어학 연구와 언어 운동의 대들보 노릇을 한 후계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였는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여 그 열매를 직접 거두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그에게서 직접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후계자들의 이름은 이후 국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되었다. 그들은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식민지 시대의 국어 운동을 지켜 나갔다. ‘맞춤법 통일안’을 제안했고 ‘표준어’를 정비했으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학자와 활동가들이 옥고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유명을 달리했다.
광복 이후 국토만 분단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후계자들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 품었던 신념에 따라 북을 선택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분단이 된 것이다. 이렇게 남북으로 나뉜 후계자들은 갈라진 반쪽 땅에서도 묵묵히 언어를 갈고 다듬는 일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정치적 상황에 훈풍이 불면 스스럼없이 함께 모여 학술 토론회도 했다. 남과 북에서 보기 드물게 함께 존경을 받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주시경을 그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한동안 진척을 못 보다가 이번에 국회의 뒷받침으로 다시 일을 추진하게 된 ‘겨레말큰사전’ 편찬도 돌이켜보면 이때 주시경이 착수했던 ‘말모이’라는 사전의 계승 작업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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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적 소통
텔레비전을 볼 때 화면 구석에 수화통역사가 나와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통역을 해주는 것이 이젠 그리 낯설지가 않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영상 편집에서는 화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따르기도 한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에는 이렇게 사회적 투자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장애인 집단과 비장애인 집단 사이의 소통이 정말 별일 없이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되돌아보면 더욱더 중요한 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수화로 통역을 하거나 점자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비장애인들의 말’을 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장애인들의 말을 비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통역과 번역의 창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장애인들이 수화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비장애인들에게 통역해주는 방송은 매우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그렇게도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무언가 할 말은 많은데 표현을 억압받고 있지는 않은가? 점자로 글을 번역하는 것을 점역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점역은 비장애인들의 글을 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점자로 적고 그것을 비장애인들에게 번역해주는 것을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소통이라는 것은 양측의 의견이나 감성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늘 한쪽은 무언가 말하고 다른 쪽은 듣기만 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을 더욱더 이해하고 공감하라고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우리 비장애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하루속히 이러한 비대칭적인 소통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이것 역시 대담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