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만남이 있을 만하면 서로 언어가 달라졌을 텐데 어쩌나 하는 말들이 많아진다. 워낙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으니 걱정을 겸해 하는 말들이다. 사실 북쪽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좀 어색하거나 ‘티’가 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어느 방언 지역 출신이나 국외 동포들의 말에서 느끼는 약간의 어색함만 가지고 언어가 달라졌다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말한 사람의 특이한 말버릇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북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는 유독 예민하게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다.
북한의 말에서 이질감을 강하게 하는 것은 일상 어휘가 아닌 사회정치적 표현들이다.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라든지, 예비군에 해당하는 ‘로농적위군’이라든지, 국방부와 같은 개념인 ‘인민무력부’, 사회주의 농업 단위인 ‘협동농장’ 등은 마치 완전히 딴 세상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려 생소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일상어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옛날의 평안도 방언은 서울말과 차이가 많았지만 이미 20세기 초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중부 방언과 합류를 했기 때문에 ‘이질화’라는 말은 그리 적절치 않다. 그러나 종종 두메산골의 강한 사투리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1990년대 초 북의 한 인사가 남쪽의 기자에게 “집에 인간이 몇이오?”라고 물어서 “북한은 이제 유물론 사상에 젖어 가족도 인간이라 부른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북한의 방언학 서적에는 “아직도 평안북도 산골에서는 ‘식구’를 ‘인간’(잉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물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낯설어진 관계가 더 문제였을 뿐이다. 좀 더 자주 만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지난날의 ‘추억의 말실수’로 기억되는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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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 차이
대화에서 문법이나 발음 못지않게 매우 예민한 것은 ‘뉘앙스’(어감)이다. 북한에서는 이 말을 ‘뜻빛갈[깔]’이라고 한다. 뉘앙스의 차이는 대화 참여자들의 ‘마음’, 곧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예민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앞으로 남과 북의 만남에서도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남과 북의 관계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 어느 중립국에서 양쪽의 유학생이 우연히 마주쳤다. 남쪽 유학생이 “외국 생활에 어려움이 많으시죠?” 하고 인사하자 상대방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워낙 이악해서 일없습네다” 하고 답변했다. ‘이악하다’는 ‘야무지다’라는 뜻이다. 이미 그 뜻을 알고 있던 남쪽 유학생은 “아, 네. 악착같다는 말씀이시죠?”라고 아는 척했는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북의 유학생은 어찌 동족에게 악착같다는 모진 말을 할 수 있냐고 서운해했다는 이야기다.
남쪽 사회는 워낙에 극심한 경쟁 체제를 경험해서인지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든지 공부했다든지 하는 말을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북한의 사전이나 문학작품 등에서는 “지주들의 악착같은 착취” 하면서 좀 더 심한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그러니 그들 나름 동족한테 사용하기에는 마땅치 않게 느꼈을 것이다. 또 달리 남쪽에서 ‘소행’이라 하면 괘씸한 짓을 가리키지만 북에서는 선행을 했을 때도 사용한다.
앞으로 남과 북이 만나면 단어 자체를 몰라서 저지르는 오해 못지않게 뉘앙스 차이 때문에 민망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선전용 확성기 철거하듯이 조금씩 서로의 방송도 개방하고, 출판물도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게 되면 이러한 문제들은 아마도 저절로 풀려나가지 않을까 한다. 뉘앙스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