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은 장삼이사 김지이지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낀 바와 깨달은 바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일종의 경구들이다. 그러한 어구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삶에서 체험되고 재현되어 온 지식들이 더께더께 덧쌓여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러한 민초들의 집단 지식에도 심각한 남성 중심의 편견이 여기저기 깔려 있는 것을.
속담 가운데 여성과 연관되는 항목만 찾아보면 여지없이 민망할 정도로 여성을 능멸하거나 깔보는 말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가장 밑바닥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기층 서민들 속에서도 여성들은 또 한번 사정없이 짓밟힌 것이다. ‘여자’나 ‘아낙’이라는 단어는 그중 점잖은 편이고 주로 ‘계집’ 혹은 무슨 ‘년’이라는 표현이 흔하다.
국어학자나 사전 편찬자들의 덕목은 이러한 속담도 ‘귀한 언어 자원’ 혹은 ‘유산’으로 소중히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사흘을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는 식의 구절을 속담집이나 사전에 그대로 올리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요즘 성추행이나 성폭력에 분노하는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가해자들이 여성에 대한 온갖 추잡한 표현이 사전에 버젓이 나와 있더라고 핑계를 대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시대가 변하면 안 쓰이는 말이나 기억에서 멀어지는 말도 생긴다. 예를 들어 그리 많이 쓰이던 ‘레지’라는 말은 어느새 가물가물한 옛말이 되었고, ‘괴뢰’라는 말은 두메산골의 사투리 같은 느낌이 날 정도가 되었다. 시대가 지나가고 딴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국어학자들도 사전에서 성평등에 어긋나는 속담들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런 속담들은 이제 전문가용 ‘연구 자료 수첩’이나 과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특수한 역사 자료집’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참여해야 할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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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상식
남과 북의 예술단이 서로 방문 공연을 하며 새로운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그동안 빙하기가 꽤 길었음에도 다행히 서투른 실수나 오해 같은 것 없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 같다. 팽팽하던 긴장을 풀어내는 데는 역시 운동경기와 예술공연을 당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이번 남북 접촉에 대한 보도에서는 자주 ‘파격’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일상화된 격식과 관행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사전을 보면 ‘파격 대우’나 ‘파격 인사’에서처럼 타성을 극복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보이기도 하고 ‘파격 의상’ ‘파격 노출’처럼 지나치게 튄다는 의미도 보여준다. 그러나 답답하기만 하던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좀 튀더라도 어느 정도 파격은 필요하다고 본다.
한쪽이 파격을 행하는 것은 사실은 상대방도 좀 신선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단계에 함께 들어서자는 제안이 맥락에 담겨 있기도 할 것이다. 상대가 파격적 행동을 하면 사실 우리도 파격을 보여줘야 할 부담이 생긴다. 그래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다시는 지난날의 헛된 수순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북쪽의 고위 책임자가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털어놓거나 최고 지도자의 부인이 통치자를 ‘남편’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오로지 북쪽의 변화만 강조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마음에는 늘 남쪽은 ‘정상’이요 북쪽의 일은 ‘정상’이 아니라는 선입관이 강하다. 냉정히 본다면 비정상적인 분단 상황에서 제대로 정상적인 것이 남과 북 어느 구석에서나 있을 수 있었겠는가? 분단이 빚은 답답한 관행을 벗어나 끊임없이 파격을 연출하면서 서로 함께 상식의 사회로 들어설 세기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