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은 서로 다른 두 면을 보여준다. 하나는 친근함이다. 허물없고 다정해 보인다. 이 경우의 반말은 대개 대칭적이다. 서로 같이 반말을 하는 것이다. 동등함과 신뢰감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경우는 비대칭적인 반말이다.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경우를 말한다. 누가 상위에 있는지 하위에 있는지 금방 드러난다.
서로 친근하게 사용하는 대칭적 반말은 옆에서 보기에도 부럽다. 비대칭적으로 반말을 사용하면서도 친근해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보호와 피보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 선후배 사이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때의 반말과 존댓말은 상하관계이지만 아랫사람에 대한 후견 기능으로 어느 정도 심리적 보완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다정한 관계도 긴장된 상황이거나 비상한 위기에 이르면 금방 거칠어지기 쉽다.
근간에 일부 직장에서 일어나는 ‘태움’ 문제는 아무리 보아도 ‘보호와 피보호 관계’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냥 그저 그런 갑질에 해당할 뿐이다. 조직 내에서의 이러한 갑질은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 업무를 빙자한 모욕과 착취에 가깝다. 선임자가 보호자인 양할 뿐 사실상 학대와 적대 행위라는 말이다.
직장 조직은, 아주 작은 소집단이 아니라면, 절대로 보호와 피보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부딪치기 쉬운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이나 공공장소에서는 서로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보장하는 것이 더 옳다. 서로 대칭적 반말을 쓸 것이 아니라면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한다. 이런 곳에서 마치 동문회 하듯이, 문중 모임 하듯이 비대칭적 반말을 쓴다는 것은 하위의 약자들을 늘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반말은 그냥 짧은 말이 아니라 특별한 사회적 관계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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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정보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믿고 있는 중요한 ‘대전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거짓이어도 대화가 된다면 그것은 개그, 희극, 농담하기, 수수께끼 등과 같은 특정한 연희에서만 가능하다.
거짓이 아닌 것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하며 모든 의사소통과 정보 전달의 기본 윤리로 삼고 있지만 근간의 정보 전달 체계에서는 이 ‘진실성’이 크게 흔들리며 ‘가짜뉴스’가 번지고 있다. 모든 지식과 정보의 전달 과정에는 전달자의 ‘경험’과 ‘판단’이 쉽게 개입한다. 게다가 워낙 많은 정보가 엄청난 속도로 전달, 분배되고 또 순식간에 재분배되고 있어서 그 통제가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이러한 통신 체계가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들의 수중에 있기도 하다.
사회 통신망을 떠도는 수많은 가짜뉴스를 막고자 양심과 도덕심에 호소해 봤자 소용이 없다. 비양심적인 뉴스도 많지만 자기 나름 확신을 가지고 쓰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이 뒤섞이고, 현실과 희망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주장의 사실 여부는 그때그때 팩트체크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또 더 나아가 진실한 정보를 지키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도 서둘러야 하겠다.
사회 통신망 덕분에 보통 사람들이 공공의 세계에 목소리를 내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가짜 정보의 홍수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모처럼 얻은 ‘대중의 지배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을 외쳐도 가짜 정보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힘겹게 공공 영역에서 목소리를 높여 가던 대중은 또다시 소외될 것이고 새로운 기술의 시대는 일부 지배 엘리트들이 자기들끼리만 건너가는 또 하나의 피안의 세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