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대화라는 말을 들으면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머리에 떠올린다. 커피 향이 퍼지고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는 곳, 그런 곳에서 웃음꽃이 피어나는 대화를 연상하는 사람은 분명히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대화의 실상은 싸움의 또 다른 실존적 모습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진지한 대화 한번 해보자고 하면 자칫 부부싸움이 되기 쉽다.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이 학생한테 대화 좀 하자고 하면 반갑기보다는 금방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반대로 학생이 선생한테 상담 한번 해달라고 해도 선생은 은근히 긴장한다. 현실적으로 해결이 잘 안되는 것이 대화의 의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사 간에 대화를 하다가 삐끗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여야 간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한번 대화하다가 말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금방 뉴스는 시끄러워지고 국회는 헛돈다. 온갖 휴전회담은 마치 전투를 재개할 핑곗거리를 찾는 대화처럼 보인다. 대화 중에서 가장 싸움을 하지 않는 대화는 상인들의 대화이다. 최선을 추구하지만 어려우면 차선도 마다하지 않는다. 차선이 어려우면 또 그다음을 찾아간다.
즐거운 축제는 지나가고 골치 아픈 대화의 시기가 돌아왔다. 남과 북의 대화도 잘해 나가야 한다. 우리와 자손들의 명운을 가르는 만남이다. 미국과의 무역 문제도 의미 있는 대화로 풀어나갔으면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과도 피할 수 없는 대화의 쟁점들이 남아 있다. 우리의 자존심과 공동체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큰 욕심 내지 말고, 이익을 서로 나누도록 하며, 아무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지혜로운 타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대화에서의 이익이 훨씬 값지기 때문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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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기
한때 ‘칭찬합시다’라는 방송 프로가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학교나 회사에서는 ‘칭찬 릴레이’라는 것이 조직 내 분위기를 훈훈하게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그 모두 칭찬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확실히 칭찬은 격려와 응원의 동력이 되는 게 사실이다.
‘칭찬’이라는 행동의 구조는 참으로 흥미롭다. 먼저 칭찬할 만한 행위를 찾아야 한다. 착한 일을 했다든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낸 사람에게 그 행위의 가치를 높이 기리는 말을 해 준다. 좀 과장을 해도 절대 무례한 일이 아니다. 그럼 거의 예외 없이 칭찬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낮추며 겸양을 나타낸다. 그러면 또다시 칭찬을 퍼붓는다. 그리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겸양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칭찬이 가져오는 일종의 긴장 국면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말다툼의 양상하고 거의 비슷한 긴장감도 감돈다.
그렇게 칭찬과 부정이 반복되며 팽팽한 긴장이 임계점에 이르는 순간 칭찬받는 사람이 그 칭찬을 수용함으로써 팽팽함이 끝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우호 관계는 더 돈독해진다. 이것이 칭찬 활동의 구조인 동시에 칭찬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미치는 영향이다. 칭찬은 사회적으로 유대감을 강화하는 매우 귀중한 언어활동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국제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보기 드물게 우리의 외교 활동이 강대국들의 바둑판을 흔들어 놓았다. 백여년 동안 바둑판에서 흔들리기만 하던 우리 남과 북이 참으로 재치있게 칭찬의 한 수를 함께 놓았다. 한동안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의 말다툼 구조에서 절묘하게 칭찬의 구조로 갈아탄 것이다. 이젠 바야흐로 고래들이 춤출 차례이다. 그리고 우리는 고래들의 춤을 구경할 순서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