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혐오사회라고들 한다. 자신의 어려움이 타인, 특히 특정 집단 탓이라고 믿고 지나치게 미워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가리킨다. 최근에는 여혐, 남혐 등 이성에 대한 지나친 혐오 발언도 넘쳐났다. 이 집단적인 혐오 감정은 특히 정치적으로 오용될 때 더욱 위험하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대표적이다.
우리도 최근까지 지역감정에 바탕을 둔 혐오 발언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진절머리 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혐오 발언이 얼마나 많은 국민을 절망에 빠뜨리곤 했는가.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건강하지 못한 집단 혐오가 있다. 바로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다. 대개는 남북 정세에 대한 분석이나 경험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선동된 감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만 해도 혹시 전쟁이 나지는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한 긴장 상태를 겨울올림픽을 지렛대 삼아 평화 분위기로 반전시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러 절차와 부차적인 진행 방식을 문제 삼아 사그라지던 북쪽에 대한 혐오를 정치적으로 살금살금 불붙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북혐 발언’이라 할 만하다. 차라리 북핵 문제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은 옳지 않다. 그러나 올림픽이 지향하는 정치적 메시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메달을 많이 따거나 꼭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이 지향하는 ‘평화’와 ‘화합’에 동참하는 일이다. 남과 북의 협력은 바로 이 가치를 이루는 지름길이 아닌가. 그것을 위해 출전 시간을 조금 줄일 수도 있고 깃발을 중립화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난 후에 승패를 떠나 열심히 경기를 치른 선수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보내는 것, 그것이 가장 윤리적이고 건강한 올림픽이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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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시키기
어느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왔다는 한 사진이 가슴을 찌른다. 종착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모습이다. 한때 백화점 문 앞에서 잘 차려입은 직원들이 도열해서 정중하게 고개 숙이던 광경이 떠오른다. 이게 인사인가, 아니면 굴욕인가?
인사를 할 때는 고개를 숙이거나 목례를 하면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가장 기본적인 소통 행위이다. 인사를 엄숙하고 정중하게 해도 이러한 상호 행위가 있으면 굴욕을 느끼지는 않는다. 문제는 비대칭적인 상하 관계를 드러내는 인사이다. 절하기와 같은 전근대적인 인사는 자칫하면 사람을 비루하게 만든다. 보통 혼인식이나 설날에, 또 제사나 성묘 때 전래 행사로 행하는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것을 실제 일상에서 남에게 강요한다면 ‘망발’이다.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들이 인사를 하면 고객도 마주 인사를 할 수 있다.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직원 가운데 가장 약자들에게, 업무 연관성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인사를 강요했다는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른바 ‘인사’라고 생각했다면 딸처럼 귀엽게 생각해서 성추행했다는 변명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서비스업에서는 안 하던 이벤트를 벌여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종종 과장된 연출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인 사회적 가치 지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어느 댓글에 달려 있다시피 진정으로 고객들한테 감사하고 싶었다면 그 회사의 임직원들이 서로 교대해 가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훨씬 적절했을 것이다. 이제는 약자들만 달달 볶으며 하는 혁신이나 발전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인사를 약자에게 대행시키는 일은 인사라는 말뜻을 왜곡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