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이왕이면 멋있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될 것을 지나치게 규범을 의식하다가 오히려 이상한 말이 나온다. 이런 것을 ‘과잉 수정’이라고 한다. 특히 방언 사용자가 표준어를 말할 때, 외국어를 배울 때 자주 일어난다. 잘 모르는 지식으로 아는 척하다가도 일어날 수 있다.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한다. “파인[pain]주스요” 하고 파인(‘pine’)이라고 발음을 제대로 했는데, 상대방이 “아, 네. 파인[fain]주스요?” 하며 ‘fine’에 해당하는 발음을 하면 그 순간 그것이 더 정확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영어를 배울 때 그 부분이 늘 우리의 취약점이었기 때문이다. 외래어를 쓰면서, 우리의 ‘ㅍ’ 발음이 종종 영어의 ‘f’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과잉 발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딱히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외국어 혹은 외래어를 사용할 때 유난히 ‘본토 발음’, 더 나아가 미국식 발음에 집착을 한다. 그러한 발음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나은 교육을 받았고, 더 많은 지식을 가졌고, 또 그러하니까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을 거라는 추측, 그리고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뷰티숍이 아니라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뷰티샵’으로, ‘록 음악’도 ‘락’ 혹은 ‘툅’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외래어 표기의 안정성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잉 수정 행위의 근저에는 사회적 차별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는 셈이다. 행여 나의 말투나 발음이 남들한테서 손가락질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말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든다. 말은 소통만이 아니라 지위와 신분을 ‘슬며시’ 보여주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옷차림이 재력을 과시하는 기능도 하듯이 말이다. 불평등한 사회는 말도 불편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