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는 말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맞춤법에는 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발음이 변하면 고민이 생긴다. 맞춤법을 고칠 것인가? 아니면 발음과 맞춤법의 일정한 차이를 인정하고 말 것인가? 발음이 달라졌다고 맞춤법을 대폭 고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을 삽시간에 문맹자 비슷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이란 단어는 자음 앞에서는 [여덜 사람]처럼 발음하고, ‘사람 여덟이 모여서’라는 문장에서처럼 모음이 오면 [여덜비]라고 발음하는 게 옳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것까지 [여더리]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느새 ‘ㅂ’ 받침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닭’이란 단어도 좀 복잡해졌다. ‘암탉’과 ‘수탉’은 모음 [이]가 뒤에 붙으면 자연스레 발음이 [암탈기]와 [수탈기]가 된다. 그런데 비교적 최신 합성어인 ‘통닭, 불닭, 옻닭’에다가 모음 [이]를 붙이면 거의 대부분이 [통다기], [불다기], [옫따기]라고 하지, [통달기], [불달기], [옫딸기]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칡’도 이제는 주로 [치글 캐다]라고 하지 [칠글 캐다] 같은 ‘표준 발음’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주로 겹받침 단어에서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발음만이 아니다. ‘내가 할게’도 눈에 띄게 ‘-할께’라고 적는 사람이 많아졌다.
문자를 사용해온 역사가 깊은 다른 언어에서는 언어 변화에 굳이 맞춤법을 따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좋은 사전을 만든다. 사전을 활용하면서 모범적인 발음과 의미의 분화, 그리고 용법을 익히는 것이다. 맞춤법과 발음이 일치하는 경우는 보통 갓 태어난 맞춤법, 즉 맞춤법의 역사가 얕은 경우에나 가능하다. 그래서 좀 불편한 진실이지만 국어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 한번에 책 하나 떼고 작별하는 공부가 아니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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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과 대응
‘망언’이라는 말은 간결한 뜻매김이 쉽지 않다. 대개의 사전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든지 ‘망령된 말’, ‘정상을 벗어난 말’과 같이 퍽 ‘감정적’인 표현을 그 뜻풀이에 사용한다. 곧 ‘뜻풀이’만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고 무언가 감성 체험을 해보아야 비로소 말뜻이 이해 가능하다. 매우 복잡한 감성이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어 이 말의 쓰임새가 조금 더 넓어졌다. 미인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해서 ‘망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며 그 말의 느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망언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사람들은 역시 정치인들이다. 정치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이다.
망언은 듣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 버린다. 문제는 그 분노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워낙에 근본적인 윤리감각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에 합리적인 설명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동일한 망언이 계속 반복되면 사실 대책이 없다. 국내 정치인들의 망언에는 투표로 심판할 수도 있건만 외국 정치인들의 발언이면 손을 쓸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화를 내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발언 내용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반격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로 망언을 일삼으면 그들의 군 조직이 성노예 혹은 성매매와 어떤 동업 관계에 있었는지를 거론해야 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문제 삼아야 한다. 그래서 ‘합리성의 지배’라는 대원칙을 더 강하게 지켜야 한다.
급하게 화내는 사람보다 질기게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망언이라고 목청을 돋우기 이전에 어떤 원리를 적용하는 게 유리한지를 냉정하게 살피는 지성이 더욱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