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일은 주어진 상황의 문제를 깨달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절차다. ‘질문’은 지식과 정보의 빈틈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답’은 바로 이 틈을 메워준다. 그래서 이 둘은 짝을 이루며, 합쳐서 ‘문답’이라고 한다. 또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만들 수도 있다. 대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백가가 그리 난해한 이론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저 제자들의 오만 가지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을 뿐이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아카데미아에서 제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무슨 복잡한 교리를 전달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그저 제자들의 질문에 짝이 맞는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은 깨달음을 얻었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의 위력이다. 인류의 지식은 이렇게 켜켜이 쌓아 올린 문답의 산물이다.
다음은 어느 기자와 검찰에 소환된 전직 대통령의 문답이다.
기자: 검찰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기자: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
모든 메시지가 언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깊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답에서는 정치를 오래 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묵직한 정치관, 법철학, 권력에 대한 통찰 등 무언가를 해석해낼 여지가 전혀 없다. 한국 정치의 답답함은 이렇게 기본적인 짝이 만들어지지 않는 문답법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롭게 묻고 성실하게 답하는 풍토, 그것이 모든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