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가 없다는 말은 보통은 국어 선생님들이 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종종 정치권에서 주고받는 논쟁에는 주어가 없다는 둥 하면서 느닷없는 문법 논쟁이 일다가는 표연히 사라지곤 한다. 문법 상식으로는 당연히 모든 문장에는 주어가 있는 것이 옳게 느껴진다. 서술어는 있는데 그 움직임의 주체인 주어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순리가 아닌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 세상의 이치를 그림 그리듯이, 또 사진 찍듯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언어 자체가 인습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그 형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숱한 언어적 법칙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어서 언어논리적인 규칙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부분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하면서 ‘비’라는 주어를 내세우는데 영어에서는 의아하게도 ‘it’이라는 가주어를 쓰기도 한다.
또 우리가 말을 하다 보면 주어나 목적어를 내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야!” 아니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주어가 없는 탓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할 사람은 없다. 어디냐고 되물으며 함께 뛰어가려 할 것이다.
언어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만도 논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다. 종종 외국에 가서 짧은 외국어로 실컷 여행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언어 능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맞이하는 그 현지인들의 감수성 덕이 더 크다. 정치인들이 주어가 없다고 둘러댈 때마다 그들의 정치적 좌표를 감수성을 가지고 들여다보라. 그들이 왜 주어가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 더욱더 큰 문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