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나 사건이 터졌을 때 당사자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워하면 주변에서 호의적인 간여를 시작한다. 이럴 때는 자신이 유대감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조언한다면서 그들에 대한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이 오로지 ‘메마른 논리’만 가득 찬 말만 던지면 차라리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된다.
미국의 흑인들이 경찰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면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구호를 외친다. 이에 대해 일부 백인들은 “모든 이의 목숨도 중요하다”고 되받아치고 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백인들의 반응이 논리적으로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그 맥락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하거나 은폐하려 하는 삐딱함을 눈치챌 수 있다.
일부 변호사들이 최근에 들어온 탈북자들에 대해 인신구제 신청을 했다. 그에 대해 또 다른 탈북자들이 그 변호사들에게 북에 남은 가족들의 인권 상황 조사를 의뢰하는 신청을 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삐딱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북녘 주민의 인권을 다룰 능력 없으면 남으로 온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뜻을 넌지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소통이 아닌 불통이 흘러넘치게 된 까닭은 말의 뜻이나 문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소통 자체를 삐딱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듯하면서도 비논리적이고, 소통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뒤통수치기가 더 앞서고 있다.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통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의 확산을 불러온다. 불통은 언어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