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무한정 할 수 있는 기회는 여간해서는 쉽게 얻을 수 없다. 아무리 너그럽게 상담이나 면담을 해준다고 해도 일정한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복을 비는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결혼식 주례사가 30분 이상 계속된다면 그저 지겨운 잔소리처럼 느끼지 않겠는가.
의회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약점도 퍽 많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장점은 다양한 의견 차이를 최소화시키면서, 느리지만, 가장 공통성이 강한 의견으로 수렴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다수결 방식으로는 최선의 결정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소수파라 해서 항상 무의미한 의견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볼 때 다수파의 오만과 오판에서 비롯한 잘못된 결정은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제한 발언권을 보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수파의 입장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무제한 발언권을 소수파가 한다면 눈물겨운 하소연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수파가 한다면 무도한 행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제도는 분명히 효율성에는 문제가 있으나 다수파의 횡포나 오류를 미리 방지하고 소수파의 역할을 보장한다는 면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노래방에서 한 사람이 마이크를 독점하면 그만큼 재미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차대한 정책을 짜증을 자제하면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은 매우 값진 제도적 산물이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많은 보도 매체들이 마치 운동 시합 중계하듯 누구는 몇 시간, 또 누구는 몇 시간 하면서 마치 발언 시간 경쟁이 붙은 것처럼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도대체 무슨 문제가 논쟁의 핵심인지를 객관적으로 보도해주면서, 무제한 발언 과정에서 나타난 민심과 여론의 향배를 정치적 합의에 적절히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