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생각하고 고민을 집중하는 것에도 물론 노하우가 있다. 무조건 애탈캐달 매달려만 있다고 문득 영감이 떨어져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유연성도 필요하고 의식적인 환기도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지만 말되, 사면팔방을 우회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밀도를 요하는 기술분야에서는 오차율이 가장 큰 적이다. 미래산업의 주력제품인 '메모리 테스터 핸들러'라는 장비는 완성된 반도체를 검사해서 불량품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등급별로 분류하는 일을 한다. 이 핸들러를 만드는 데에는 이만여 개의 정밀한 부품이 필요하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얘기다. 미래산업은 백지의 상태에서 이 장비를 국산화했다. 난관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어려움을 해결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흡사한 과정을 반복했다.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한다. 그래도 방법이 안나오면 실망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로부터 획기적인 발상이 튀어나온다.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면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라는 것을 개발하려다 처참히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을 때, 우리는 축적된 기술을 다시 핸들러 개발에 도전했다. 그런 반도체란 워낙에 작고 예민한 물건이라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여차하면 핸들링은커녕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조심하자니 느리고, 서두르자니 위험했다. 엔지니어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보아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들과 나는 입장이 달랐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내겐 죽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의 내 상황이 꼭 그랬다. 내가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절박성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내게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탄창이었다.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한꺼번에 정돈시켜 검사소켓에 정확하게 접속시킬 수 잇는 보조장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정밀할뿐더러 빠르지 않겠는가. 직렬에서 병렬과 발상을 전환하니 드디어 길이 보였다. 한국식 16병렬, 32병렬, 64병렬 테스트 핸들러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PCB드릴링머신을 개발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전자부품용 회로가판에 필요한 수많은 구멍들을 자동으로 뚫어주는 장비였다. 당연히 회로도에 그려진 수많은 구멍들의 좌표를 정확하고 빠르게 기계에 입력시켜줘야 한다. 보통은 회로도 입력을 위해 초정밀카메라를 썼다. 그런데 광각에 따른 공차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였다. 렌즈와 수직에 위치한 구멍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렌즈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공차가 심해졌다. 엔지니어들은 그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 역시 잠자고 있을 때말고는 항상 그 문제만 생각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또한 끊임없이 사고의 방향을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몇천만 원짜리 장비 한 대를 위해 여러 대의 비싼 카메라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메라 한 대로 여러 대의 효과를 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해답은 스캐닝이었다. 기판이 움직이든, 카메라가 움직이든, 아무튼 어느 한쪽이 움직이면서 여러 장의 근접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겠는가.
신의 공평한 것은, 이러한 획기적인 발상도 죽어라고 고민하고 실험하는 과정이 없으면 결코 나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획기적인 발상이 먼저 있다고 해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면 항상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튀어나와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변수들을 거의 모두 경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서 획기적인 발상이 나와준다면 성공은 시간문제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이 나를 '기술학교 교장선생'이 되게 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와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 고생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며 아이디어가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고생들은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머리를 빌려 결실을 맺는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무엇이든 열심히 찾아 나가면, 언젠가는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물건'이 튀어나오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