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아이들은 잡초처럼 키워라
공장을 천안으로 옮길 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직원이 천안으로 따라 이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신문에 이른바 '천안 대이동'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 무렵 직원들이 가장 근심했던 것이 바로 자녀교육 문제였다.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학부모들인 바에야, 수도권을 이탈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잡초론'이다. 아이들이라면 벌에도 쏘여보고 지렁이도 죽여보면서 커야 제대로 크는 것이라고 말이다.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을 한번 둘러봐. 아니면 애들 주변의 친구들을 한번 보라구.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취향, 똑같은 말투, 똑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말야. 선생들이나 부모들이나 하나같이 애들이 엉뚱한 짓 못하도록 들볶기만 하니까 그리 되는 거라구. 그게 바보로 만드는 거지 뭔가.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로 도망 오는 것이 애들한테도 다행인 일이야. 순박한 시골 애들과 함께 마음껏 뒤섞여 놀게 하라구. 사랑하고 믿어주기만 한다면 애들은 잘못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며,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석연찮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내가 가진 증거물을 들이대는 것이다. 우리 집 큰애가 1964년 생이고, 막내가 1970년 생이다. 그러니까 6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낳은 셈이다. 일찌감치 홀로 되신 어머니는 손자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는데 내리 딸 셋을 낳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내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 재수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 때문에 잡지사에서 몇 번인가 취재요청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성공적인 자녀교육법의 '비결'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인터뷰가 곤혹스럽다. 아이들을 키운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을 위해 자녀교육법이라도 연구해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억지고 생각해낸 말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방목'이다.
80년에 해직 당하고 뒤늦게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느라 나는 집안문제에 벼로 신경을 못 썼다. 그냥 바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죽느냐 사느냐의 긴박감 속에 있었다. 당연히 가계는 물론이려니와 아이들 교육문제도 뒷전이었다. 남들처럼 일류대에 보내겠다고 과외를 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학비마저 제때 줘서 보내지 못하는 판국에 과외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봄이면 모내기하느라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고 여름, 가을이면 개구리며 풀벌레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말로야 서울이 싫다고들 하지만 자녀교육이며 직장 등을 핑계로 모두들 변두리 생활을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원래 원지동은 참외와 수박이 유명했는데 우리 집도 밭에다 직접 심어 먹었다. 여고 2학년부터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골고루였던 아이들이 모두 삽이며 괭이를 들고 밭일을 도왔다. 그러고도 틈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손발이 새까매지도록 뛰어 놀았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항상 침울해 있던 내게 그런 집안 분위기는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아버지와 묵묵히 집안일을 지키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철도 일찍 났던 모양이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집안 여건을 비관하고 비뚤어지기도 했으리라. 시키지 않아도 모두들 힘을 합쳐 집안일 에 한몫씩을 해왔다. 그 민감할 나이에 학비를 제때 주지 못해도 울거나 짜증내는 녀석 하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맏딸은 이화여대 건강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딸은 세종대학 성악과, 셋째 딸은 덕성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넷째이자 장남은 중앙대 기계공학과와 동대학원을 마쳤고, 막내는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실적으로 꼽힌다. 모두 재수 한 번 안하고 소위'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밝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던 것도 경쟁 없는 시골 분위기에서 따뜻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한 방향대로 자라주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방목'이라고 대답할 밖에.
딸들은 모두 성실하고 평범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 아들은 각각 현대자동차와 삼성신용카드에 근무하고 있다. 큰아들은 수도권 근무를 마다하고 일부러 생산 부서를 지원해서 지금 울산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평생직장으로 삼아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겠다는 그 마음이 기특하다. 막내아들은 대학원을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학문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곧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게 더 낫다'라고 설득했더니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일류대학 출신자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모습이 또한 대견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를 자기 뜻대로 재단하고 다그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아이들을 못 믿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잡아두려고 한다. 그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피곤하게 만든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다면, 눈 딱 감고 풀어 기르자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계획표를 짜주고 시간표를 짜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세상을 마음껏 모험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자녀경영에도 벤처 정신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대한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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