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한다는 것은 손상된 자기정당성을 말하기를 통해 회복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사과하는 사람이 자기가 잘했다는 말인지 잘못했다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 이리저리 둘러대거나 남의 말 하듯이 한다면 자기정당성을 회복할 수가 없다. 참된 사과의 표현은 뉘우치는 자에게는 잘못을 면소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사회윤리 척도를 재확인하면서 서로의 유대관계를 회복시킨다. 또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데 매우 유용하다.
종종 이런저런 큰 사건이 터졌을 때 관계된 책임자 혹은 공직자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공연히 망신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왕 터진 사건을 마무리하는 기회에 우리 사회윤리의 기준과 내부적인 유대관계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어두웠던 부분을 드러내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함으로써 다시는 과거가 반복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20세기의 양차 대전은 참혹한 역사적 비극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각자가 무엇을 했는지를 잘 새겨 두고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이것은 남을 지배했던 자들이나 지배당했던 자들 모두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동 행위이다.
사과를 하려면 아주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자존심 살린다고 일부러 사과를 엉성하게 하거나 희화화해 버리면 훗날 똑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말을 바르게 하라는 것은 틀리지 않게 하라는 뜻도 있지만 옳은 태도로 말하라는 뜻도 있다.
사과를 받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다. 우물우물 넘어가는 사과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지나가 버린다면 그것 역시 문제다. 그것은 자존심이 없는 행위인 동시에 그러한 책임 회피에 동조하거나 또 그들과 공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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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짓
예로부터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면 으레 하늘이 벌을 내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재난 혹은 재앙이라고 했다. 그러한 말 앞에서 우리는 힘이 쪽 빠지게 마련이다. 그 까닭은 피해는 엄청난데 그 가해자가 없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 다 운수소관 아니면 하늘의 뜻이라고 하며 망연자실하게 된다.
사람들의 지식이 축적되면서 대부분의 재난이 자연의 법칙을 사람들이 충분히 알지 못한 까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잘못이거나 예방을 소홀히 한 탓임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요즘은 신문 지면에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표현이 적잖게 나타난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비판적인 표현에도 여전히 숨어 있는 책임과 원인을 찾아내려 하지 않고 체념하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일으킨 사고를 ‘재난’이라는 관념에 연동시킨 것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지진이나 해일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재난은 사실 누군가가 그 원인을 만든 경우가 많다. 붕괴 사고, 화재 사고, 폭발 사고 등은 여지없이 누군가의 실수나 무책임 때문에 일어났다. 심지어 산불이나 돌림병의 확산도 사람 탓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곧 재난이 아니라 사고인 셈이다. 그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당연히 범죄자와 책임자가 있게 마련이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말이 사태의 인과관계를 깨달은 의식의 발전을 보여주듯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자연의 직접적인 도발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재난이 아닌 사고다. 그리고 책임자와 가해자가 ‘복잡한 구조’ 속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을 찾아내서 책임을 묻는 일이 앞으로 더욱 ‘안전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제는 “재난이 아니라 범죄”라는 시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