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는 지금의 간호사에 대한 호칭이 간호부였다. 주로 양성소에서 길러냈다. 나중에 간호대학이 생기면서 대우도 달라졌고 이름도 간호원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더 발전되어 대학원도 생겨 학위도 받게 되자 스스로 간호사라는 명칭을 썼다. 직업 범주의 발전과 이에 따른 명칭의 변화가 함께 한 것이다. 이름으로만 본다면 의사, 약사와 함께 보건 의료 활동을 주도하는 전문가의 세 가지 주류 직업에 제대로 자리매김을 한 셈이다.
좀 다른 경우는 가사 보조원에 대한 경우이다. 오래전에는 식모라는 이름으로 매우 종속적인 직업이었다. 월급도 없이 먹이고 재워주고 나중에 결혼시켜 주고 끝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 이후 가정부로, 또 가사도우미로 이름을 바꾸면서 처음의 종속성은 탈피하고 독자적인 직업 범주를 형성해내게 되었다.
또 다른 직업군을 보자. 역시 오래전에는 직업으로 차량 운전을 하는 사람들을 운전수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언젠가 운전사로 바뀌었고, 또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기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직업으로서의 지위나 대우가 좋아졌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름만 바뀐 것 같다.
어휘의 변화는 형태의 변화에 걸맞은 의미의 변화도 필요하다. 의미는 그저 그대로인데 허울만 그럴듯해진 것은 그만큼 내실이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청소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그들의 삶은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변함없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저임금, 과잉 노동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직업의 명칭이 더 나은 모습으로 듣기 좋게 바뀌어 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내용, 곧 의미의 발전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어휘의 겉모습만 바꾸는 성형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의 변화가 없이 말 껍데기만 슬쩍 바꾸는 포장술로는 사회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사회적 위선, 아니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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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질서와 개인정보
신문 같은 보도 매체에서 어떤 사람을 언급할 때에는 그에 대한 개인 정보를 간략이 덧붙여서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대개 직업이나 직함 또는 알려진 명성 따위를 언급해 주는 것이다. 한때는 그 사람의 나이를 괄호 속에 넣는 일이 흔했는데 요즘은 보기 드물다. 또 여성일 경우에는 역시 괄호 속에 ‘여’라고 써넣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별 의미 없는 정보를 알려줬구나 하고 실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사람이 나온 대학의 이름을 슬그머니 비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이제는 그러한 낡은 방식의 사적 정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위계나 사회적 선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의 중심부에서는 이러한 개인의 별거 아닌 정보 요소로 건전하지 못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인습이 남아 있어 무척 답답하다. 예를 들어 사법시험 출신자들에 대한 언급에는 거의 예외 없이 몇 회 합격자인지를, 연수원 몇 기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기수 후배가 상관이 되면 그 선배 기수들이 통째로 물러난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인사 정책이 당연시되는 것은 큰 문제다.
더 답답한 것은 선후배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회의원들조차 재선이니 삼선이니 하며 단식농성할 때 초선인 주제에 선두에 서지 않는다고 하거나, 삼선 이상이면 당연히 무슨 당직을 주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민주주의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개인 정보는 그의 능력이나 그릇의 크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잘되려면 잘난 후배가 하루속히 못난 선배를 앞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되도록 법조인들에 대한 정보는 과거에 어떤 판례를, 혹은 어떤 변호나 사건 기소를 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덧붙이거나, 국회의원들은 과거에 어떤 법안을 마련한 경력이 있다는 등의 개인 정보를 드러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로 다가서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