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계 언어들의 대명사는 매우 체계적이다. 단수와 복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중성, 더 나아가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 등을 대명사에 체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어의 대명사, 특히 삼인칭은 빈곤한 편이다. 그냥 ‘그 사람, 이 친구, 저 녀석, 그 여자’ 하듯이 단어를 나열하여 제삼자를 일컬어왔다. 한편 훨씬 자유롭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서구적인 문화 형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몇몇 문필가들이 우리에게 삼인칭 대명사로 ‘그’와 ‘그녀’를 사용했다. 특히 일본어 그(彼·かれ·가레)와 그녀(彼女·かのじょ·가노조)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우리에게는 원래 없었던 삼인칭 대명사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 대명사들은 글을 쓸 때는 어느 정도 사용이 되지만 말로 할 때는 전혀 아니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 문법 체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어휘인 셈이다.
세월은 흘러 오늘날에는 ‘양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사회 윤리의 중요한 지향점이 되었다. 그래서 ‘여의사, 여교사, 여직원’처럼 성적인 표시를 피하는 것이 올바른 언어 예절로 받아들여진다. 선입관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남성과 여성을 문법적으로 반드시 드러내는 유럽계 언어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매우 곤혹스러워한다. 반면에 우리는 앞에 붙이던 ‘여-’라는 접두사를 빼버리면 간단히 끝난다. 그리고 마음속의 차별 의식을 극복하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나아가 보자. 10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정착을 못한 삼인칭 대명사 가운데 ‘그녀’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 본다. 여성들이 굳이 좋아하는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차라리 ‘그’라는 삼인칭을 탈남성화하여 남녀 구별 없이 범용화된 대명사로 쓰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태도가 아닐까? 아직 우리 감각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 말을 떼어내 버리고, 더 나은 언어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면 이것도 의미 있는 작은 결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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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
오래전 실학자들이 깨친 것 하나가 ‘중국이 세상의 가운데가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지구의를 돌려 보면 이 세상에 가운데가 아닌 곳이 없다. 좀 쑥스럽지만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한때 우리도 이런저런 분야의 ‘허브’를 해보겠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중심을 뜻하는 듯한 말이 하나 있다. ‘서양’이라는 말이다. ‘동양’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무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느끼게 한다. 그에 비해 ‘동양’은 종종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지만 초라하거나 넉넉지 못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세상은 ‘동쪽’과 ‘서쪽’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쪽도 있고 북쪽도 있으며 어떤 중간 지대도 가능하다. 그래서 동양이라는 말에 중동 지방이 들어가는지는 좀 자신이 없고, 서양이라는 말에 아프리카가 포함되는지 확신이 안 선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말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형성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세를 드러낸다. 서유럽에 밀리는 아시아 지역을 대충 ‘동양’이라고 한 것이고 열강이라는 이름으로 들이닥친 그들을 모두 ‘서양’이라고 단순화했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졌다. 동양이 옛날처럼 그리 만만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의 상당 지역이 궁색해지기도 했다. 동서양을 걸쳐 있는 러시아도 있고, 아프리카와 중남미도 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우리 동쪽에 있지 않은가? 러시아가 서양이라면 서양은 사실상 두만강 건너편이 아닌가?
동양을 아시아로 해석해도 모든 아시아인들이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언어적으로는 벵갈어와 그 서쪽의 언어들은 유럽계이다.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단순한 말로는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다. 이런 말로는 지난 시기의 실학자들보다 세상을 더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 이제는 하루속히 옛말 사전에 밀어 넣어야 할 단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