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색
박근혜 대통령의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취임 3년차를 맞아 청와대 직원 조회에 참석했을 때의 옷차림이다. 통상 비서실장이 주관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나섰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카키색 상의에 검정 바지 정장 차림의 박 대통령이…’(ㅇ뉴스), ‘취임식 때 입었던 카키색 정장과 비슷한 차림으로…’(ㅎ일보), ‘…카키색 상의를 입고 직원들 앞에 섰다’(ㅈ일보). 한 방송은 “카키가 뭡니까? 군대에서 입는 전투복이에요…”라며 “(카키색은)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복색”이라 해석하기도 했다.(ㅇ케이블 뉴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방색 재킷을 입었다’(ㄷ일보)고 전한 신문도 있었다. 취임식 이후 해마다 같은 날 같은 빛깔로 차려입은 대통령의 옷은 카키색인가, 국방색인가.
카키색은 ‘누른빛에 엷은 갈색이 섞인 빛깔’이니, 그날 대통령이 입은 재킷은 ‘나뭇잎이나 풀잎과 같은 짙은 초록색’인 국방색에 가깝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인터넷 뉴스 검색 결과는 ‘대통령-카키색’ 29만4000개, ‘대통령-국방색’ 288개로 차이가 크다.(구글 뉴스) 황토색과 초록색, 확연히 다른 것인데도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 건 ‘군복=카키’라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카키색은 흙먼지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카크’에서 온 말이다. ‘카키’(khaki)는 인도가 영국 식민지일 때의 군복 색깔이었다. 이후 사막과 해변에서 작전하는 군의 위장색으로 애용되었다.(위키백과) ‘카키’가 넓은 지역에 걸쳐 오랜 세월 군복의 위장색으로 사용되었기에 우리나라에선 ‘국방색’으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육군의 군복 빛깔과 같은 카키색이나 어두운 녹갈색’이라 설명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흐리터분한 ‘국방색’ 풀이는 그래서 문제다. 그릇된 새김이 그렇고, ‘카키색’(탁한 황갈색. 주로 군복에 많이 쓴다), ‘카키복’(카키색의 군복. ‘카키’는 인도어로 ‘흙’을 뜻한다)의 뜻풀이와도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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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뉴스’(news)는 ‘새로운 것’(new)의 복수형이다. 한때 ‘북(N)-동(E)-서(W)-남(S) 사방에서 전해오는 기별을 한데 모은 소식’이란 그럴듯한 주장에 솔깃했던 적이 있었지만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권이 아닌 다른 나라의 같은 뜻 표현도 ‘새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얻은 소득은 ‘뉴스의 어원 확인’만이 아니었다. ‘동서남북’을 서양에서는 ‘북-남-동-서’ 순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 동분서주, 동문서답, 동서고금처럼 방향을 짚을 땐 언제나 ‘동’(東)이 ‘서’(西)에 앞선다. 남남북녀, 남전북답(南田北畓, 논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뜻)에서 보듯 ‘남’(南)은 ‘북’(北)보다 앞선다. 우리 지도와 사전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동북아시아만 있을 뿐 ‘남동(남서/북동)아시아’는 없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방언 이야기>는 ‘동남 방언’, ‘서남 방언’,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제주 방언’으로 나눠 설명한다. 미국 델타항공에 합병된 ‘노스웨스트항공’(NWA)은 영어 순서(북-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서북항공’으로 불렸다. 자석을 다른 말로 ‘지남철’(指南鐵)이라 하는 것도 새겨볼 만하다. 방위를 매길 때 우리는 동-서-남-북 순으로 꼽은 것이다.
말은 문화다. 문화에서 말이 비롯한다. 방위 순서에도 문화가 담겨 있다. 서양의 ‘북동아시아’(Northeast-)를 우리 언어문화에 맞춰 ‘동북아시아’라 하는 건 그래서다. 유럽 관점에서 나온 ‘극동’(the Far East), ‘근동’(the Near East)이란 명칭은 ‘동아시아’, ‘서아시아’로 바꾼 지 제법 되었다. 영국의 패권이 한창이던 19세기에 등장한 ‘중동’(the Middle East)은 이렇다 할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지리적 경계를 떠나 문화·종교적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동’을 갈음할 말, 뭐가 있을까.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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