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은 말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이다. ‘2014년엔 온갖 거짓이 진실인 양, 수많은 사슴들이 말로 바뀌어 말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는’ 요즘 현실을 담아낸 표현이다. 선정 이유가 ‘말’(馬)과 ‘말’(言)의 뜻이 뒤섞인 중의적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슴을 두고 말이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사슴을 보면서 멀쩡한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말’이라고 멀쩡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멀쩡한 인간들에겐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섯 차례 거듭한 ‘멀쩡하다’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중의적’(重義-)은 ‘한 단어나 문장이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또는 그런 것’이고 ‘다의적’(多義-)은 ‘한 낱말이나 표현에 여러 가지 뜻이 있는, 또는 그런 것’이다. 사전은 ‘멀쩡하다’의 뜻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흠이 없고 아주 온전한)멀쩡한 사슴을, (지저분한 것이 없고 아주 깨끗한)멀쩡한 세상에 (정신이 맑고 또렷한)멀쩡한 사람이, (그릇된 짓을 하는 태도가 예사롭거나 뻔뻔한)멀쩡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속셈이 있고 아주 약삭빠른)멀쩡한 사람은 밥 먹듯 하는 일일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며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말이다. 멀쩡한 거짓말로 뒷일 모른 채 눈앞의 권력에만 붙어사는 멀쩡한 사람들을 보며 ‘송구영신’의 원말을 떠올린다. <한서>(漢書) ‘왕가전’(王嘉傳)에 나오는 ‘송고영신’(送故迎新)이다. ‘구관(옛 관리)을 보내고 신관(새 관리)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십상시’에 ‘문고리 3인방’, ‘7인회’가 유령처럼 떠돌던 올해가 저문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면 새해에 걸맞은 새사람이 오기를 기대한다. 기왕이면 ‘흠이 없고 온전한, 정신이 맑고 또렷한’ 멀쩡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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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빈
다양한 송년회를 치르며 여기저기에서 사회자 노릇을 했다. 내 재주 부릴 곳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스물 몇 해 방송 월급쟁이로 살아온 덕분이다. 웬만한 행사에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단상이나 앞자리에 앉은 이를 소개하는 일이다.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서 사회를 맡았을 때가 새삼스럽다. 식순에 ‘내빈’과 ‘외빈’, 그리고 마무리 즈음엔 ‘내외빈’ 소개가 있었다. ‘-빈’(賓, 손님)은 알겠는데 ‘내/외-’의 구별이 아리송했다. 선배에게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주최 측 고위층은 ‘내빈’이고 외부 인사는 ‘외빈’, ‘내외빈’은 둘을 한데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안팎의 차이’라는 중견 아나운서의 답은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은 ‘확언’으로 남았다. 이후 줄곧 그렇게 알고 살았다. 지난해 마지막날, 불현듯 잘못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전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내빈’은 ‘내빈’(來-, 오다)으로 ‘모임에 공식적으로 초대를 받고 온 사람. 초대 손님’이다. ‘내빈’(內-)은 여자 손님을 일컫는 ‘안손님’이다. 남자 손님을 이르는 ‘바깥손님’의 반대말인 것이다. ‘외빈’(外-)은 ‘외부나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이지만 대개 ‘외국 손님’을 가리킬 때 쓴다. ‘우방 제국으로부터의 외빈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ㄷ일보, 1948년 8월15일)처럼 오래전부터 써온 표현이다.
널리 쓰이는 사전 밖의 말 가운데 하나가 ‘내외빈’이다. ‘한국 독립을 위하여 노력한 내외빈을 위문하게 되었다’(ㄱ신문, 1948년 8월), ‘졸업식에 참석한 내외빈과 환담하고…’(ㅇ뉴스, 1998년 3월), ‘야구공원 기공식에 참석한 내·외빈’(ㅇ경제, 2014년 7월)처럼 ‘내외(內外)귀빈’과 한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국어원의 ‘온라인 가나다’는 ‘내외 귀빈’을 다루면서 ‘행사를 주최한 기관에 속해 있는 사람도 행사에 참석한 손님이라는 점을 고려해’ 설명했다. ‘내외빈’과 ‘내빈’(내부 손님)은 이제 표제어 대접을 해줄 때가 되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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