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문인 교류를 위해 북한에 다녀온 선배가 들려준 ‘전구 시리즈’가 있다. 휘황한 전등으로 빛나는 만찬장에서 들었다며 그가 전한 내용은 대충 이랬다. “북에서는 전구를 불이 들어오는 알, ‘불알’이라고 한다. 형광등은 ‘긴불알’이고, 거기에 꽂혀 있는 점등관은 ‘씨불알’이다. ‘불알’ 여럿으로 만든 것은 ‘떼불알’, 가로등은 ‘선불알’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 만나서 ‘불알’ 얘기 꺼내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얘기는 한자어와 외래어 다듬어 쓰는 북한 언어 정책을 비틀어 지어낸 것일 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우스개가 농담을 넘어 진담처럼 퍼져 있다. 그냥 떠도는 게 아니라 ㄱ 교수(ㅅ스포츠신문 칼럼), ㄱ 논설위원(ㅅ신문)처럼 일부에서는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에서는 샹들리에를 ‘무리등’(여러 개의 전등알이나 갖가지 모양의 형광등으로 이루어진 큰 조명등)이라 하지만 ‘샨데리야’도 적지 않게 쓰인다. 흔히 ‘스타트전구(램프)’라 하는 점등관(글로스타터)은 북한 사전에 ‘글로우스위치’(glow switch)로 올라 있기도 하다. 표기 방식의 차이일 뿐 북한도 외래어를 제한적으로나마 쓰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꼬마전구’는 북한에 가면 ‘콩알전구’가 된다. ‘전등알’(전기알), ‘등알’은 전구를 두루 이르는 북한말이다.(표준국어대사전) ‘내년부터 백열전구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전구 시리즈’를 떠올렸지만 ‘백열전구’에 담긴 뜻도 새겨볼 만하다. ‘백열’(白熱)의 뜻은 ‘물체가 흰빛이 날 만큼 온도가 높음’, ‘최고조로 오른 기운이나 열정’이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백열’은 물리 현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백열하다’, ‘백열적이다’처럼 인성을 드러낼 때도 쓰는 표현인 것이다. 새 기술에 밀려 백열전구는 사라지지만 그 불빛 아래에서 일하고 바느질하고 공부하던 우리의 백열함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
풋닭곰
올해 중복에 수산시장 나들이를 했다. 모처럼 저녁 함께하자며 불러낸 선배 따라 간 곳은 시장 한구석의 횟집이다. 가게는 허름했지만 여러 해산물이 올라온 상차림은 풍성했다. 푸지게 차려낸 밥상의 주인공은 민어였다. 점심은 구내식당의 삼계탕을 먹고 저녁에는 민어회와 부레, 탕까지 끓여 먹었으니 복달임이란 핑계로 과한 호사를 누린 셈이다. 국어사전은 복달임을 ‘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치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음’으로 좁게 설명하지만, 민속사전은 여기에 ‘…물가를 찾아가 더위를 이기는 일’을 넣어 ‘복놀이’를 포함한 넓은 뜻으로 풀이한다.
복달임 음식 재료로 미꾸라지를 빼놓을 수 없다. 미꾸라지를 넣는 방식에 따라 추탕과 추어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통째로 넣는 게 서울식의 추탕이다. 삼복 즈음에 맛과 영양이 정점에 오르는 민어는 부레를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이라 한다. 흔히 보신탕이라 부르는 개장국, ‘개’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과 닭고기로 끓인 닭개장 따위도 빼놓을 수 없다. 닭개장이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이어서인지 ‘닭계장’도 제법 쓰이지만 맞지 않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르게 해주는 복달임 음식의 대표는 뭐니 뭐니 해도 삼계탕이고 계삼탕이다.
계삼탕은 ‘삼계탕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지만 삼계탕의 원말이기도 하다. 닭고기가 주재료이니 ‘계+(인)삼+탕’이었다가 귀했던 인삼을 앞세운 표현인 삼계탕이 된 것이다. 삼계탕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63년이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약병아리와 한뜻인 ‘영계’(병아리보다 조금 큰 어린 닭)로 만든 영계백숙은 ‘영’(young)과 무관한 말이다. ‘연계’(軟鷄)가 영계의 원말이다. ‘초여름에 풋닭곰, 삼복에 개장, 초가을에 미꾸라지 국’이란 북한 속담이 있다. ‘풋닭’은 ‘채 다 자라지 못한 닭’(소설어 사전)이고 북한에서는 삼계탕을 ‘닭곰’(북한어휘사전)이라 하니 ‘풋닭곰’은? 그렇다, 영계백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