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부 건너에는 ‘백색공포정치 수난자 기념비’가 있다. 1947년 2월27일 전매품인 담배를 팔던 여성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2·28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대륙에서 온 ‘외성인’이 원주민인 ‘내성인’을 과잉진압하면서 촉발된 이 사태는 28일에 타이베이시 전역으로, 그 이후에는 대만 전 섬으로 확대되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7년까지 40년간 이어진 ‘백색공포’로 희생된 사람은 최대 2만8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실체는 여태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만의 ‘2·28사건’ 이듬해 제주에서는 ‘4·3사건’이 발생했다. ‘섬 해안선 5㎞ 밖의 사람을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지슬>이 관객 13만명을 넘어섰다. <지슬>을 보는 관객은 눈물 콧물 훔치다가 어느새 키득대며 웃는다. ‘일제 총, 미제 총’을 두고 승강이하는 대목, 제 목숨 위태로운데도 ‘홀로 남은 돼지 밥’을 걱정하는 원식이 삼촌의 대사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무동 어멍(어머니)이 불에 타 죽으면서 남긴 감자, 군인에게 유린된 순덕의 주검 옆에 놓인 감자를 보면서는 눈물이 흐른다. 제목이 ‘지슬’인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제주 출신 후배에게 <지슬>을 본 소감을 물었더니 이메일로 답이 왔다. ‘4·3사건’에 대한 소회보다 ‘대사의 사실성’에 주목한 내용이었다. 뭍의 관객을 위해 자막 처리한 사투리는 물론이고 상황 속 대화도 ‘토박이의 실상을 잘 담아냈다’는 것이다. ‘어른들과 대화하는 시간보다 텔레비전을 접하는 시간이 많은 젊은층은 지슬이 무슨 말인지 영화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밝힌 그의 답장은 이렇게 끝났다. ‘말과 역사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4·3과 감저(고구마)와 지슬(감자)이 모두 잊혀져 갑니다.’ 그의 말에는 잊혀가는 ‘4·3’과 사라져가는 제주 사투리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