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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rimal.cs.pusan.ac.kr/urimal_new/learn/history/godae.asp#samgukji
[고대국어] 고대 한반도 및 이에 연결된 대륙의 일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언어가 있었다. 7세기 후반에 백제와 고구려가 잇달아 멸망한 뒤에 백제와 고구려의 언어는 점차 신라어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한반도의 언어적 통일이 성취되어 갔다.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두나 향찰과 비슷한 표기법이 있었겠지만, 이들은 주로 신라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두는 우리말이 된 한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수한 한문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향찰은 신라의 향가 문학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시기: - 10C(신라 멸망) 의의: 언어적 통일 시기 자료: 여러 역사책에 나오는 고유명사 표기(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인명, 지명, 관명 등), 이두 자료, 향찰-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 균여전에 실린 보현시원가 11수, 신라어 어휘를 기록한 단편, 고대 일본어에 들어간 차용어 표기: 한문(석독, 음독) |
[전기 중세국어] 중세국어의 시기는 10세기부터 16세기까지 7세기 동안에 걸친다. 그러나 전기·후기의 구분은 왕조의 변혁이나 훈민정음의 창제와는 관계가 없다. 조선이 건국되어 서울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졌으나, 개성과 한양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고려 중앙어가 그대로 조선 중앙어로 계승된 것이었다. 훈민정음 역시 어디까지나 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 출현이 국어의 음운, 문법, 어휘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14세기에 그 음운체계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시기: 고려건국 - 16C(고대국어의 중심어는 서라벌) 의의: 중심어가 이동했고 고려의 중심어는 조선으로 계승되었다.(개성과 한양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 자료: 계림유사, 향악구급방 표기: 중세국어에 와서 한자어가 격증하였다. 고려 광종 9년(958)에 과거제도를 실시한 것도 하나의 자극이 되어서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완전히 문인 학자는 물론 일반 관리까지도 구어로서는 우리말을 사용하고 문어로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기형적인 이중생활을 하였다. 이리하여 거의 모든 문화적 학술적 용어는 한자어에 의존함으로써 국어는 이들 엄청난 한자어에 압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
[후기 중세국어] 후기 중세국어 특히 15세기 중엽은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이 때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 문자로 많은 문헌이 간행된 데 있다.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훈민정음의 원리와 원형을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에서 국어의 역사적 연구가 싹텄다. 시기:14 - 16C 의의: 이 시기부터 훈민정음으로 많은 문헌이 간행되었다. 자료: 조선관역어, 훈민정음 |
[근대국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회와 문화에서 점차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안으로는 상업, 수공업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 사회적인 변화가 현저했고, 밖으로는 서양 문물에 접하여 그 자극을 받은 결과였다. 이리하여 18세기에 들어 융성한 실학과 서민 문학이 발전했다. 시기: 17 - 19C말 정서법: 사성, ㆁ, ㅿ이 없어짐 어두합용병서에 혼란이 생겨 ㅄ계 낱말은 17C 소멸 종성의 ㅅ,ㄷ 혼란 어두가 된소리인 낱말이 증가 구개음화 생겨남 ㆍ소실 원순모음화가 일어남 모음조화의 파괴가 일어남 |
[현대국어] 1945년 이후에 한글전용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화기부터 계속되었던 표준어와 정서법의 확립은 국문 정리 사업의 핵심이었다. 시기: 20C - 정서법: 모음체계에 혼란 ㅔ/ㅐ, ㅟ/ㅚ 음절구조는 `자음+(반모음)+모음+자음`의 형태가 됨 외국어의 영향 약어사용 |
[삼국지 위지동이전] 기원전후 부여(고구려, 부여, 예, 옥저), 한(마한, 변한, 진한), 숙신계(여진) 언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志(삼국지, 289년)의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에 적힌 기록을 보면, 북쪽에는 夫餘(부여),高句麗(고구려),沃沮(옥저),濊(예)의 언어들이 있었다. 고구려는 "東夷舊語 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이라 하였고, 동옥저에 대해서는 "其言語與高句麗大同 時時小異"라 하였으며 예에 대해서는 "言語法俗 大抵與高句麗同"이라 하였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이들 언어는 서로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
[양서 백제전] 고구려와 백제는 언어가 비슷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의 유이민이므로 지배층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피지배층의 언어는 한계언어였을 것이다. 梁書(양서, 629년) 百濟傳(백제전)을 보면, 백제어는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이라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백제의 지배족의 언어에 관한 기술로 생각된다. |
[훈민정음 언해]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은 해례본 훈민정음과 언해본 훈민정음의 두 가지가 있다. 이는 모두 새로 만든 우리 글인 `훈민정음`을 풀이한 책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해례본은 본문과 해례 및 정인지의 서문으로 되어 있고, 언해본은 예의편인 본문이 중심이며 이에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더하여 언해한 것이다. 언해본의 판본은 몇 가지가 있는데 월인석보 첫째 권 머리에 실려 있는 것을 1586년(선조 6년)이라는 간기가 있는 희방사본이라고 부른다. 해례본은 정인지의 서문에 의하여 1446년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언해본의 지어진 연대와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구별한 점, 이영보래법을 규정하고 있는 점 등을 보아 <동국정운>이 이루어진 때부터 <월인석보> 간행에 이르는 동안에 집현전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희방사본 밖에 언해본의 이본으로는, 박승빈 소장 단행본, 일본 궁내성 소장본, 일본인 가나자와 소장본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 세종 25년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자 이에 대한 해례서가 세종 28년(1446년)에 한문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름도 훈민정음이다. 이 한문본 훈민정음은 언해본 훈민정음과 구별하기 위해 한문본 훈민정음, 원본 훈민정음 또는 해례본 훈민정음이라 불린다. 내용은, 세종 어제 서문과 새로 만든 글자의 음가와 그 운용법을 밝힌 예의가 본문으로 되어 있고, 이를 해설한 해례가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의 차례로 나뉘어져 있으며 끝에 정인지 서문이 붙어 있다. 해례에는 제자 원리, 음가, 글자의 운용법, 음운 체계 등이 상세하게 해설되어 있다. 현존하는 판본은 전형필님 소장본으며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
[동국정운]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을 만드리 위해 중국 음운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종 임금과 집현전 학사들이 당시 조선 한자음과 중국 음운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고 소리 글자인 훈민정음을 써서 조선 한자음을 바로 잡으려고 만든 운서이다. 세종 29년 9월에 만들어져 세종 30년 10월에 간행되었다. 엮은이는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이며, 신숙주가 서문을 썼다. 동국정운의 자모체계는 훈민정음과 같은 사성 23 자모체계이며 운은 모두 91운이다. 동국정운식 교정음은, 중국 한자음도 조선 한자음도 아닌 교정음이므로 오래가지 못하고, 만들어진지 약 40년 뒤인 성종 중기부터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한자음 실은 방식은, 이제까지 운서가 해오던 방식과는 달리 같은 운을 한데 묶은 다음 그 안에서 성조의 차례에 따라 글자를 벌여 놓은 것이다. 판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어 전형필님이 소장하고 있는 권1, 권6(국보71보) 전씨본, 1972년 강릉 심교만님 집에서 발견되어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6권6책 전질(국보 142호)이 있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정인지의 서와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의 진전을 따르면 새종(1445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권 10뒤에 있는 최항의 발문에는 세종 29년(1447년) 2월에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편찬이 완성된 것은 이 해 10월이다. 원문인 노래는 정인지, 권제, 안지가 짓고, 주해는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영손의 입곱 사람이 하고, 발문은 최항이 썼다. 짜임은 125장의 노래가 10권으로 되어 있는데, 정인지의 서문, 정인지, 권제, 안지의 진전, 노래 125장(한글 노래말, 한시, 한문주), 최항의 발문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조선조의 창업을 기린 것으로,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의 터닦음으로부터 태종에까지 6대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왕업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이어 오는 임금들에게 왕업을 지킴에 있어 삼가야 할 것을 들어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 것인데, 1장과 125장을 빼고는 대련 형식이다. 용비어천가는 새로 지은 훈민정음으로 제일 먼저 만든 노래이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우리말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해 주는 문헌으로 어학적 자료의 가치가 높은 반면, 악장체 문학으로서의 문학, 음악적 가치와 그 내용상 역사적 가치 또한 높은 자료이다. 초간본은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권1,2가 전하고, 중간본은 규장각 문고에 4종이 전한다. 그 중 광해군 4년(1612년)의 중간본이, 완본으로 전해지는 최고의 것이다. - 김영송(1994), 우리옛글(1), 세종출판사 |
[한글날]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을 발견하여 그 말문(末文)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므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출처: 한국브리태니커회사, '브리태니커 CD 2000'의 "한글날"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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