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혀두고, 빼고, 내치고, 물리치는 뜻으로 ‘배제하다, 배척하다, 제외하다’ 따위를 쓴다. 힘이 센 쪽, 부려쓸 수단이 많은 쪽, 많이 알고 있는 쪽에서 주로 쓰는, 움직임이 구체적인 말이다.
“부시는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조각 과정에서 친일파를 철저히 배제하지는 않았다”처럼 말이다. 여기서 겁을 먹게 하는 것은 ‘핵무기’에도 약간은 있겠지만 실제로는 ‘배제하지 않는다’는 서술어 곧 그것이 안고 있는 행동성 때문이다.
보통 ‘배제하다’를 쓸 때 ‘가능성’을 앞세워 표현을 누그러뜨릴 때가 많다. 누그러뜨리기는 하나 역시, 위협·경고 효과를 노리면서 말하는 방식인 것은 마찬가지다. 때로는 확신이나 단정을 하고서 그것이 빗나갈 수도 있으므로 그 책임을 비켜가고자 이런 말을 쓰기도 한다. 이때 역시 ‘가능성’을 끌어다 쓰는데, “~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 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는 않는다”가 그런 말투다. 이는 남의 말을 따올 때나 말하는 이 스스로 분석할 때 두루 자주 나온다.
이 역시 영어(rule out the possibility, can’t completely rule out possibility, can’t exclude the possibility 따위)에서 온 번역문투다. 영어공부를 하지 않은 이가 없는 까닭에 버릇된 말투인데, 이젠 유행도 지난 성싶으니 그만 쓰거나 달리 쓰는 게 좋겠다. 그냥 “가능성도 있다, ~ 할 수 있다, 여지도 있다”로 쓰거나 심에 차지 않으면 “~ 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 할 가능성을 아주 젖혀놓은 것은 아니다” 정도로는 손질을 해서 쓸 일이다.
△지금까지 핵사용 가능성을 배제해 온 터여서 → 지금까지 핵사용은 고려하지 않은 터여서
△논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 논의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국제정치의 속성상 미국과 중국의 갈등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 ~ 미국과 중국이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은밀한 뒷거래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 뒷거래를 했을 수도 있다
△박찬호와 우디 윌리엄스 가운데 한 명은 불펜으로 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 불펜으로 밀릴 수도 있다
△처녀생식 및 돌연변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 처녀생식이나 돌연변이였을 수도 있다
△미국의 북폭은 남한 정부 등 국제사회와 사전 협의 없이 기습적으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 협의 없이 기습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번역어·차용어도 그렇지만 번역투 문장도 우리말 표현에 두드러지게 어긋나지 않고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면 문제될 건 없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