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학생들이 영문법 공부에 쏟는 시간이 국문법 공부에 쏟는 시간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랄 일은 아니다. 국어야 모국어이므로 문법을 모르더라도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지만, 외국어인 영어를 익히자면 문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터이다. 다만 국문법을 잘 모르다 보니 국문법 체계를 영문법 체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글을 쓰면서 수식어를 너무 많이 쓰지 말라는 뜻으로 “형용사를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이는 영어 형용사와 국어 형용사의 차이를 모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영어 형용사는 부사와 함께 꾸밈말로 쓰인다. 하지만 우리말 형용사는 동사와 함께 풀이말로 쓰인다.
“진보주의라는 개념은 역사상 없으며, 오직 ‘진보적’이란 형용사로 존재한다.” 신문 칼럼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 주장의 시비를 가리는 것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다. 다만 ‘진보적’이란 낱말을 형용사라고 한 것은 영문법 체계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 ‘progressive’는 형용사이지만 우리말 ‘진보적’은 명사이거나 관형사이다. “그 사람은 진보적이다”에서는 명사, “진보적 사고를 가져라”에서는 관형사이다. 임자씨(체언)를 꾸미는 기능에서 우리말의 관형사는 영어의 형용사와 흡사하다. 그러나 영어의 형용사는 ‘be 동사’와 어울려 문장의 보어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말의 관형사는 조사도 붙지 않고 어미 활용도 하지 않는 매우 폐쇄적인 품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