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5년(1443년), 개성부의 ‘묵디’(無叱知)는 사람을 죽였고, 전옥서의 기매는 남의 묘를 파헤쳐 옷을 훔쳤으니 모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형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無叱知는 ‘뭇디/묵디’를 적으나 ‘묵지’(납을 끓여 만든 덩어리 따위)라는 말이 있으므로 ‘묵디’가 옳은 듯하다. 중종실록에는 ‘묵디금이’란 이름도 보인다.
곡식 따위를 빻아 체에 쳐서 가루를 내고 남은 것도 ‘묵지/무거리’라고도 한다. 담뱃대는 ‘물부리·설대·담배통’ 세 부분으로 나뉜다. 물부리는 고장 따라 ‘대묵지·무추리·물초리’라고도 한다. ‘무거리·무초리’도 사람이름에 보인다. ‘초리/추리’가 든 이름에 ‘너초리/너추리·늦초리·망추리·부초리·수초리·엇초리/엇추리·이초리/이추리’도 있다. ‘부출’(부초리)은 가구 네 귀퉁이에 세운 기둥, 뒷간 바닥에 까는 널빤지다.
사람이름을 살피면 ‘뒷간이’도 모자라 ‘부초리’까지 보인다. 옛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난 곳은 어디든 신성하게 여겼던 것일까? 이름으로 말미암은 ‘무거리’(왕따) 취급과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으리라. 이로 보면 전통사회는 무한 경쟁 사회와 썩 달랐던 것 같다. 옛말에서 문틀은 ‘문부출/문얼굴’, 목덜미는 ‘목부출’, ‘묵지/구년묵이’는 여러 해 묵은 것, 어떤 일에 오래 종사한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