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쫓겨나고 폐세자와 폐빈은 교동도로 귀양 갔다(위리안치). 인조 1년(1623년), 폐세자가 가시울타리 밑으로 땅굴을 파 밤중에 달아나다가 나졸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막덕을 문초하니 두 사람이 여러 번 죽으려 하였으며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를 보내오자 이를 보고 굴을 뚫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징 등이 유희분의 집 종 ‘이귿수’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며 잡아와 국문하였다. 그를 신문한 기록(공초)에는 “폐동궁이 굴을 파고 탈출하려 하니 부디 두모포 뱃사람 ‘더펄이’(加八里)에게 배를 가지고 갑곶으로 오라고 권채가 말했다”고 하였다.
널리 쓰인 이름인 ‘더펄이’를 달리 ‘덥퍼리’라고 적은 문헌도 있다. 털이나 머리카락이 더부룩하여 출렁이듯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더펄더펄’이라고 한다. ‘더펄가히/더펄개’(尨)는 ‘긴 털이 더부룩하게 더펄거리는 개’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자 尨(방)은 삽살개 뜻도 있다. 고장에 따라서 귓바퀴 위가 아래로 처진 사람을 ‘더펄이’라 한다. 달리 침착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사람, 스스럼없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도 ‘더펄이’라고 한다.
더펄이와 비슷한 이름에 ‘더벅이·더벌이·더부러기’도 있다. ‘더펄개’의 모습 ‘더펄이’는 ‘더벅머리’와 통한다. ‘더벌이’는 ‘떠버리’인 듯도 하다. ‘더펄’을 밑말로 한 이름에 ‘더펄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