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레마을과 시루
땅이름
김유정이 태어난 마을 이름은 실레마을이다. 한자어로는 ‘증리’(甑里)라 하니 이는 곧 떡을 찌는 ‘시루’를 뜻한다. 김유정은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로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득한 마을로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라고 묘사하였다.
땅이름 가운데는 땅의 모양에서 생겨난 것들이 많다. 실레마을이 시루를 닮은 데서 비롯된 것처럼 시루를 닮은 산을 ‘시루뫼’ 또는 ‘증봉’, ‘증산’이라고 부른다. ‘시루봉’은 분지를 이룬 마을에서는 비교적 자주 발견되며, 시루의 방언인 ‘시리’, ‘실리’, ‘실기’, ‘슬구’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시루의 겉모습이 둥긋한 데 비해 시루의 안쪽은 옴팍하게 파여 있으니, 김유정의 고향 마을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실레’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빈약한 촌” 마을인 실레마을에서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디인가 시적이고 어수룩하고 꾸밈이 없다”는 김유정의 <봄봄> 마을.
땅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시 그 이름을 닮아가며 살아간다. 생강나무를 동백꽃이라 하고, 지주와 빚쟁이들이 무서워 제 논의 벼를 수확하지 못한 채 몰래 베어 먹어야 하는 동생을 위해 밤새 도둑을 지키는 형을 ‘만무방’(염치없이 막돼먹은 사람)이라 부르는 순박함이 실레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음을 김유정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