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가을이 깊어가면서 ‘메뚜기’가 뛰어다니고, 장독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대는가 하면, 따사로운 햇볕에 각종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벌레’는 ‘버러지’와 함께 표준말로 쓰인다.
‘벌레’의 15세기 형태는 ‘벌에’다. 이 당시의 표기 방식은 ‘몸애〉모매’처럼 연철 표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벌에’는 ‘버레’가 아닌 ‘벌에’로 적었다. ‘몰애’(沙)도 같은 유형이다. 제2음절에 쓰이는 ‘ㅇ’은 ‘ㄱ’이 약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벌에’의 이전 형태는 ‘벌게’로 추정할 수 있고, ‘몰애’의 이전 형태는 ‘몰개’로 추정할 수 있다.
‘벌레’의 방언 형태는 ‘벌레, 버래, 버러지, 벌게, 벌거지’가 있다. ‘벌게’의 경우는 ‘벌에/버래’보다 오래된 형태다. 그래서 ‘벌게’의 경우 고장말에서는 ‘벌개, 벌기, 블기’ 등으로 나타나고, ‘벌레’는 ‘버래, 벌레, 버랭이’로 나타난다.
‘벌거지〉버러지’의 변화에서 보는 것처럼, ‘벌거지’도 ‘벌ㄱ’에 뒷가지 ‘-어지’를 연결해 쓰는 고어형이다. 방언에서는 ‘벌거지, 벌가지, 벌걱지, 블그니, 벌갱이’로 쓰인다. ‘버러지’는 ‘벌’에 접미사 ‘-어지’를 연결한 것으로 ‘벌러지, 버럭지, 버레기’가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벌게, 벌거지’가 단순히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가 아니라, 중세국어인 ‘벌에’보다 이전에 썼던 옛말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방언에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말이 많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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