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
전한(前漢) 9대 황제인 선제(宣帝:B.C. 74~49) 때의 일이다. 서북 변방에 사는 티베트계(系) 유목 민족인 강족(羌族)이 쳐들어왔다. 한나라 군사는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제는 어사대부(御史大夫:검찰총장)인 병길(丙吉)에게 후장군(後將軍) 조충국(趙充國)을 찾아가 토벌군의 장수로 누가 적임자인지 물어 보라고 명했다. 당시 조충국은 나이 70이 넘은 노장(老將)이었다. 그는 일찍이 7대 황제인 무제(武帝:B.C. 141~87) 때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의 휘하 장수로 흉노 토벌에 출전했다가 포위되자 불과 100여 명의 군사로써 혈전(血戰) 끝에 포위망을 뚫고 전군을 구출했다. 그 공으로 거기 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된 그는 이때부터 오랑캐 토벌전의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 조충국을 찾아온 병길은 이렇게 말했다.
“강족을 치는데 누가 적임자인지, 장군에게 물어 보랍시는 어명을 받고 왔소이다.”
그러자 조충국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디 노신(老臣)을 능가할 사람이 있겠소?”
선제는 조충국을 불러 강족 토벌에 대해 물었다.
“강족을 토벌하는데 계책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또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오?”
조충국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옵니다[百聞不如一見].’ 무릇 군사(軍事)란 실지를 보지 않고는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오니 원컨대 신을 금성군[金城郡:감숙성 난주(甘肅省蘭州) 부근]으로 보내 주시 오소서. 계책은 현지를 살펴 본 다음에 아뢰겠나이다.”
선제는 기꺼이 윤허했다.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조충국은 기병(騎兵)보다 둔전병(屯田兵)을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상주했다. 그 후 이 계책이 채택됨으로써 강족의 반란도 수그러졌다고 한다.
[주] 둔전병 : 변경(邊境)에 주둔(駐屯)/토착(土着)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도 짓게 하던 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