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 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字는 孔明, 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조(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