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롱망촉 /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만 부림'을 이르는 말.
《出典》'後漢書' 光武紀 / '三國志' 魏志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 (감숙성)에 외효,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睡陽: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割據)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분자(劉盆子), 유영(劉永), 이헌(李憲), 공손술(公孫述)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A.D 33), 광무제와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외아들 외구순(氓寇恂)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A.D 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평정의 숙원(宿願)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