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은 외척(外戚)에 의해 망했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황건적(黃巾賊)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태평도(太平道)의 교조 장각(張角)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주(幽州) 탁현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劉備)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張飛)였고, 그 다음에 관우(關羽)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요청(要請)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桃園結義]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조조[魏], 손권[吳]과 함께 촉(蜀)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