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 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初 戰)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李陵)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厚待)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 : 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옵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사마천은 이를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 적고, 이어 착찹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