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 장해(張偕)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한(後漢)시대, 경전(經典)에 뛰어난 성도(成都)출신의 장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데다, 그와 교제하려는
황족들이나 귀족들까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이러한 붐비는 생활과 벼슬을 싫어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학문외에도 도가(道家)의 도술을 익혀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사방 5리나 안개를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곤 했다. 그 당시 사방 3리 정도의 안개를 일으킨다는 배우(裵優)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 도술을 장해에게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이 바람에 장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五里霧中 이란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듯 현재의 상태를 알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사방(四方) 5리에 안개가 덮여 있는 속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행방이나 사태의 추이를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대고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장해는《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宿儒: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주]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말은 ‘오리무’에 ‘중(中)’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중’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함. 방술 :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方士)의 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