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는 학문을 즐겼던 한 왕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경제(景帝)에게는 유덕(劉德)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덕은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에 봉하여지고 하간왕이 되었다. 그는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하였다. 진시황이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후 고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오기도 하였다.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도 하간왕 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진(秦)나라 이전의 옛책들을 그에게 바쳤으며, 일부 학자들은 직접 하간왕과 함께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자, 유덕은 한무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과 고대의 학문을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그는 학문 탐구를 즐길뿐만 아니라 옛날 책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修學好古, 實事求是) 라고 말했다.
實事求是(By verification of the facts to get the truth) 란 실제에 근거하여 진리를 밝혀 냄 을 뜻하며, 바로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漢書》'河間獻王德傳'에 실려 있는, '학문을 닦아 예를 좋아하고,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함.(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나온 말이다. 19세기 초기, 즉 청나라 말기에서부터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계몽사상가로서 활약한 양계초(梁啓超)는《淸代學術槪論》을 써서 淸代 학술의 개론을 시도한 사람이다. 양계초는 다시 능정감(凌廷堪)이 대진(戴震)을 위하여 지은《事略狀》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이용하여 대진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옛날 하간(河間)의 헌왕(獻王)은 실사(實事)에 대하여 옳음을 구하였다. 도대체 실사(實事)의 앞에 있으면서 내가 옳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내가 그르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은 억지로 말하여 이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한다." (《교례당집》35권 )
더구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학문의 표적으로서 존중한 것은 대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도 후배에 해당하는 청나라 왕조의 학자들 중에는 주대소(朱大韶)나 왕정진(王廷珍)과 같이, 스스로를 '實事求是'라고 아호를 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실을 토대로 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며, 청조(淸朝)의 고증학파가 공론(空論)만 일삼는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반동으로 내세운 표어이다.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은 정확한 고증을 존중하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연구의 입장을 취했다.